가섭원 부여기(迦葉原 夫餘紀)
가섭원 부여기(迦葉原 夫餘紀)
시조 해부루1) 재위 39년(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
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岔陵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
을미 원년(B.C.86), 왕은 북부여(北夫餘)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迦葉原)2) 혹은 분능(岔陵)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표범․곰․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丁酉三年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使及時飽暖又給田耕作不數年國富民殷時有時雨滋岔陵民歌王正春之謠
정유(B.C.84) 3년, 국상(國相) 아란불(阿蘭弗)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능(岔陵)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正春)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壬寅八年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仍升天不是父母責其無媒而從之遂謫居邊室高慕漱本名弗離支或曰高辰之孫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河伯女) 유화(柳花)부인3)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高慕漱)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 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弗離支)이며 혹은 고진(高辰)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柳花)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歲五月五日柳花夫人生一卵有一男子破殼而出是謂高朱蒙骨表英偉年甫七歲自作弓矢百發百中夫餘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은 고주몽(高朱蒙)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甲辰十年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