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檀君世紀) : 제22세-제43세
22세 단군 색불루 재위 48년(二十二世 檀君 索弗婁 在位四十八年)
丙申元年帝命修築鹿山改官制秋九月親幸藏唐京立廟祀高登王十一月親率九桓之師屢戰破殷都尋和又得大戰破之明年二月追至河上而受捷賀遷弁民于淮垈之地使之畜農國威大振
병신 원년(B.C.1285), 단제 명하사 녹산(鹿山)을 개축시키고 관제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엔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시어 묘(廟)를 세우고 고등왕(高登王)을 제사지냈다. 11월 몸소 구한(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싸워 은나라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황하 주변에서 승전의 하례를 받고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떨쳐졌다.
辰丑六年臣智陸右奏曰阿斯達千年帝業之地大運已盡寧古塔王氣濃厚以勝於白岳山請築城移之帝不許曰新都已宅更何他往
신축 6년(B.C.1280), 신지(臣智)인 육우(陸右)는,「아사달은 천년 제업의 땅이라 해도 대운(大運)이 이미 다했으며, 영고탑은 왕기가 짙어 백악산을 오히려 능가하는 듯합니다. 청컨데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시옵소서」라고 상주하였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신도(新都)에 이미 집이 있는데 다시 어째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乙卯二十年至是藍國頗强與孤竹君逐諸賊南遷至俺瀆忽居之近於殷境使黎巴達頒兵進據邠岐與其遺民相結立國稱黎與西戎雜處於殷家諸侯之間藍氏威勢甚盛皇化遠及恒山以南之地
을묘 20년(B.C.1266),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孤竹君)과 더불어 여러 적들을 쫓고 남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邠)․기(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에 섞여 살게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辛未三十六年邊將申督因兵作亂帝暫避于寧古塔民多從之
신미 36년(B.C.1250), 변방의 장수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이에 단제가 한동안 영고탑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따랐다.
癸未四十八年帝崩太子阿忽立
계미 48년(B.C.1238),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23세 단군 아홀 재위 76년(二十三世 檀君 阿忽 在位七十六年)
甲申元年命皇叔固弗加治樂浪忽遣熊乫孫與藍國君觀南征之兵置六邑於殷地殷人相爭不決乃進兵攻破之秋七月誅申督還都命釋囚浮
갑신 원년(B.C.1237), 단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 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서 결판을 보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쳐부수었다. 가을 7월 신독(申督)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乙酉二年藍國君今達與靑邱君句麗君會于周愷合蒙古里之兵所到破殷城柵深入奧地定淮岱之地分封蒲古氏於淹盈古氏於徐邦古氏於淮殷人望風煌怯莫敢近之
을유 2년(B.C.1236), 남국(藍國) 왕 금달(今達)이 청구(靑邱) 왕, 구려(句麗)1) 왕과 주개(周愷)에서 회합하여 몽고리(蒙古里)의 병력까지 합쳐 가는 곳마다 은나라의 성책을 부수고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한 뒤 포고씨(蒲古氏)를 엄(淹) 땅에, 영고씨(寧古氏)를 서(徐) 땅에, 방고씨(邦古氏)를 회(淮) 땅에 각각 봉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戊子五年召二韓及五加議停寧古塔移都事
무자 5년(B.C.1233), 이한(二韓) 및 오가(五加)를 불러서 영고탑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의논하는 것은 중지하도록 하였다.
己亥七十六年帝崩太子延那立
기해 76년(B.C.11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24세 단군 연나 재위 11년(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十一年)
庚子元年命皇叔固弗加爲攝政
경자 원년(B.C.1161), 황숙 고불가를 섭정으로 삼았다.
辛丑二年諸汗奉詔增設蘇塗祭天國家有大事異災則輒禱之定民志于一
신축 2년(B.C.1160), 여러 한(汗)들은 조서를 받들고 소도를 증설하여 하늘에 제 지냈으며, 나라에 큰일이나 이변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 기도하여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庚戌十一年帝崩太子率那立
경술 11년(B.C.1151), 단재 붕어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25세 단군 솔나 재위 88년(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八十八年)
辛亥元年
丁亥三十七年箕徙居西華謝絶人事
신해 원년(B.C.1150)
정해 37년(B.C.1114), 기자(箕子)2)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丁酉四十七年帝在上蘇塗講古禮因間侫臣直臣之分三郞洪雲性進對曰執理不屈者直臣也畏威曲從者侫臣也君源臣流源旣濁矣流其求淸是爲不可故君聖然後臣直帝曰善哉
정유 47년(B.C.1104), 단제께서 상소도(上蘇塗)에 계시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의례를 강론하시다가 아첨하는 신하<영신侫臣(侫은 佞의 속자)>과 바른 신하<직신直臣>의 구분을 물으셨다. 이에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서서 대답했다.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를 바른 신하<直臣>라하고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혀 복종하는 신하를 아첨하는 신하<侫臣>라 합니다. 임금이 물의 근원이라면 신하는 흘러가는 물이니 근원이 흐리면 흐름이 맑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거룩한 다음에야 신하가 바른 법입니다.」
단제 가로되「옳은 말인지고」라 하였다.
己酉五十九年田穀豊登有一莖五穗之栗
기유 59년(B.C.1092), 밭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가 있었다.
戊寅八十八年帝崩太子鄒魯立
무인 88년(B.C.106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26세 단군 추로 재위 65년(二十六世 檀君 鄒魯 在位六十五年)
己卯元年秋七月白岳山溪谷白鹿二百作隊而來遊
기묘 원년(B.C.1062), 가을 7월 백악산의 계곡에 흰 사슴 200마리가 무리 지어 와서 뛰놀았다.
癸末六十五年帝崩太子豆密立
계미 65년(B.C.998),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27세 단군 두밀 재위 26년(二十七世 檀君 豆密 在位二十六年)
甲申元年天海水溢斯阿蘭山崩是歲須密爾國養雲國句茶川國 皆遣使獻方物
갑신 원년(B.C.997),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이 해 수밀이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辛卯八年太旱之餘大雨注下民無收穫帝命發倉周給
신묘 8년(B.C.990), 큰 가뭄 뒤끝에 큰비가 쏟아지듯 내려 백성들의 수확이 없으매, 단제는 명을 내려 창고를 열어 널리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己酉二十六年帝崩奚牟立
기유 26년(B.C.972), 단제 붕어하시고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28세 단군 해모 재위 28년(二十八世 檀君 奚牟 在位二十八年)
庚戌元年帝有疾使白衣童子禱天尋瘉
경술 원년(B.C.971), 단제 앓으시니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에 기도하도록 하니 곧 병이 나으셨다.
庚申十一年夏四月旋風大起暴雨注下陸上魚類亂墜
경신 11년(B.C.961) 여름 4월,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니 땅위에 물고기가 쏟아져 내렸다.
丁卯十八年氷海諸汗遣使入貢
정묘 18년(B.C.954), 빙해(氷海)의 뭇 한(汗)들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丁丑二十八年帝崩摩休立
정축 28년(B.C.944), 단제 붕어하시니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29세 단군 마휴 재위 34년(二十九世 檀君 摩休 在位三十四年)
戊寅元年周人入貢
무인 원년(B.C.943), 주나라 사람이 공물을 바쳤다.
乙酉八年夏地震
을유 8년(B.C.936) 여름, 지진이 있었다.
丙戌九年南海潮水退三尺
병술 9년(B.C.935), 남해의 조수(潮水)가 3척이나 물러갔다.
辛亥三十四年帝崩太子奈休立
신해 34년(B.C.9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했다.
30세 단군 내휴 재위 35년(三十世 檀君 奈休 在位三十五年)
壬子元年
帝南巡觀靑邱之政刻石蚩尤天王功德西至奄瀆忽會分朝諸汗閱兵祭天與周人修好
임자원년(B.C.909)
청구의 다스림을 둘러보시고 돌에 치우천왕의 공덕을 새겼다. 서쪽으로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의 여러 한(汗)들과 만난 후 병사들을 사열하고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주(周)나라 사람과도 수교를 맺었다.
丙辰五年凶奴入貢
병진 5년(B.C.905),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
丙戌三十五年帝崩太子登兀立
병술 35년(B.C.87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등올(登屼)이 즉위하였다.
31세 단군 등올 재위 25년(三十一世 檀君 登兀 在位二十五年)
丁亥元年
壬寅十六年鳳鳴白岳麒麟來遊上苑
정해 원년(B.C.874)
임인 16년(B.C.859), 봉황이 백악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노닐었다.
辛亥二十五年帝崩子鄒密立
신해 25년(B.C.850), 단제 붕어하시고 아들 추밀(雛密)이 즉위하였다.
32세 단군 추밀 재위 30년(三十二世 檀君 鄒密 在位三十年)
壬子元年
甲寅三年鮮卑山酋長 們古入貢
임자 원년(B.C.849)
갑인 3년(B.C.847), 선비산(鮮卑山)의 추장 문고(們古)가 공물을 바쳤다.
癸亥十二年楚大夫李文起入朝
계해 12년(B.C.838), 초나라 대부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甲子十三年三月日蝕
갑자 13년(B.C.837), 3월에 일식이 있었다.
丙寅十五年農作大饑
병인 15년(B.C.835),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辛巳三十年帝崩太子甘勿立
신사 30년(B.C.82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했다.
33세 단군 감물 재위 24년(三十三世 檀君 甘勿 在位二十四年)
壬午元年
癸未二年周人來獻虎象之皮
임오 원년(B.C.819)
계미 2년(B.C.818), 주나라 사람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戊子七年寧古塔西門外甘勿山之下建三聖祠親祭有誓告文曰
무자 7년(B.C.813), 영고탑 서문 밖 감물산(甘勿山) 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리셨다. 맹세하여 올린 글<서고문(誓告文)>이 있으니,
三聖之尊與神齊功三神之德因聖益大虛粗同體個全一如智生雙修形魂俱衍眞敎乃立信久自明乘勢以尊回光反躬截彼白岳萬古一蒼列聖繼作文興禮樂規模斯大道術淵宏執一含三會三歸一大演天戒永世爲法
「삼성의 존귀함은 신과 더불어 그 공이 나란하며 삼신의 덕은 성인으로 인하여 크게 유익하나니, 빈 것과 찬 것은 한 몸이요<虛粗同體>, 낱개와 전체는 오직 하나일 뿐<個全一如>, 지혜와 삶을 함께 닦고<智生雙修>, 모습과 얼을 함께 넓히나니<形魂俱衍>, 이에 따라 참다운 가르침이 서고 믿음이 오래감은 자명한 이치라. 그 기세를 귀하게 여기고 스스로 살피고 되돌아본다면 저 백악은 어딜 가나 끝없이 푸르리니 여러 성인들은 끝없이 이어나고 글은 흥하고 예와 악은 이로써 크리니, 도술은 그 연원이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합쳐서 하나로 돌아오네<會三歸一>. 크게 하늘 가르침을 펴시고 영세토록 법으로 삼으리라.」라고 하였다.
乙巳二十四年帝崩太子奧婁門立
을사 24년(B.C.79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오루문(奧婁門) 즉위하다.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三十四世 檀君 奧婁門 在位二十三年)
丙午元年是歲五穀豊熟萬姓歡康作兜里之歌其歌曰
병오 원년(B.C.795),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之歌)를 지어 부르니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天有朝暾明光熙耀國有聖人德敎廣被大邑國
我倍達聖朝多多人不見苛政熙皞歌之長太平
하늘엔 아침해 맑은 빛 내려 비추고
나라엔 어진 이 큰 가르침 널리 내려와
큰 배달나라 사람마다 마음 편하고
밝고 밝은 노래 속에 끝없이 태평하라.
乙卯十年兩日竝出仍黃霧四塞
을묘 10년(B.C.786),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戊辰二十三年帝崩太子沙伐立
무진 23년(B.C.77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했다.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三十五世 檀君 沙伐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甲戌六年是歲有蝗蟲大水
기사 원년(B.C.772)
갑술 6년(B.C.767), 이 해에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壬午十四年虎入宮殿
임오 14년(B.C.759),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壬辰二十四年有大水山崩壞谷充塡
임진 24년(B.C.748), 큰 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戊午五十年帝遣將彦波弗哈平海上熊襲
무오 50년(B.C.723),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3)을 보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4)을 평정하였다. 5)
甲戌六十六年帝遣祖乙直穿燕都與齊兵戰于臨淄之南郊告捷
갑술 66년(B.C.707), 단제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賣勒立
병자 68년(B.C.705),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했다.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三十六世 檀君 賣勒 在位五十八年)
丁丑元年
甲辰二十八年有地震海溢
정축 원년(B.C.704)
갑진 28년(B.C.677),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戊申三十二年西村民家牛生八足犢
무진 32년(B.C.673),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辛亥三十五年龍馬出於天河背有星文
신해 35년(B.C.670),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甲寅三十八年遣陜野侯裵幋命往討海上十二月三道悉平
갑인 38년(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6)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참고)7)
戊辰五十二年帝遣兵與須臾兵伐燕燕人告急於齊齊人大擧入孤竹遇我伏兵戰不利乞和而去
무진 52년(B.C.653),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8)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甲戌五十八年帝崩太子麻勿立
갑술 58년(B.C.647),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했다.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三十七世 檀君 麻勿 在位五十六年)
乙亥元年
庚午五十六年帝南巡至淇水崩太子多勿立
을해 원년(B.C.646)
경오 56년(B.C.591), 단제께서는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38세 단군 다물 재위45년(三十八世 檀君 多勿 在位四十五年)
辛未元年
乙卯四十五年帝崩太子豆忽立
신미 원년(B.C.590)
을묘 45년(B.C.54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39세 단군 두홀 재위 36년(三十九世 檀君 豆忽 在位三十六年)
丙辰元年
辛卯三十六年帝崩太子達音立
병진 원년(B.C.545)
신묘 36년(B.C.510),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四十世 檀君 達音 在位十八年)
壬辰元年
己酉十八年帝崩太子音次立
임진 원년(B.C.509)
기유 18년(B.C.4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41세 단군 음차 재위 20년(四十一世 檀君 音次 在位二十年)
庚戌元年
己巳二十年帝崩太子乙于支立
경술 원년(B.C.491)
기사 20년(B.C.47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四十二世 檀君 乙于支 在位十年)
庚午元年
己卯十年帝崩太子勿理立
경오 원년(B.C.471)
기묘 10년(B.C.46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勿里)가 즉위하였다.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四十三世 檀君 勿理 在位三十六年)
庚辰元年
乙卯三十六年隆安獵戶于和沖自稱將軍聚衆數萬陷西北三十六郡帝遣兵不克冬賊圍都城急攻帝與左右宮人奉廟社主浮舟而下之海頭尋崩
경진 원년(B.C.461)
을묘 36년(B.C.426), 융안(隆安)의 사냥족<獵戶> 우화충(于和冲)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 만 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是歲白民城褥薩丘勿以命起兵先據藏唐京九地師從之東西鴨綠十八城皆遣兵來援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들이 그를 따르니 동․서의 압록(鴨綠)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내 원조하여 왔다. (설명)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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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려(句麗 : 九黎, 일명 夫餘) : 고대 우리 민족은 온 세상 또는 아주 넓은 지역을 가리킬 때 9 또는 8이라는 숫자를 사용하였는데, 9는 중앙과 8방(方)을, 8은 중앙을 뺀 8방을 가리킨다. 따라서 구려(九黎), 구주(九州), 구지(九地), 8대주(八大州) 등은 온 세상 또는 아주 넓은 지역이라는 뜻이다. 고대 우리민족은 온 세상을 9방으로 보고 하늘나라를 구천(九天)이라 부르고 지상세계를 구지(九地)라 불렀는데, 구려(九黎)는 자신들의 조상(祖上)이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과 같이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왔다고 믿은 무리(黎)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즉 구려(九黎)는 고대에 만주, 한반도, 일본열도 등지에 살면서 해와 달을 천제(天帝)로 숭배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뒤에 구려(九黎) 앞에 "高"자를 붙여 나라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삼국유사> 마한(馬韓) 편에는 구려(九黎)가 구이(九夷)로 적혀 있고, 환단고기에는 구려(九黎)가 부여(夫餘) 또는 구환(九桓)으로 적혀 있다. 구려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을 반드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고대에 구려 무리들이 사용한 용어는 구려 무리들의 신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구려 무리들은 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天帝)이라 믿었고 해님을 환인(桓因) 또는 옥황상제(玉皇上帝)라 부르고, 달님을 월지(月支, 月氏)라 불렀다. 이들은 하늘에 환한 하늘나라(桓國)가 있다고 믿고, 이 하늘나라에는 하늘나라 임금님인 해님(桓因, 玉皇上帝)과 비왕(裨王 : 보조왕)인 달님(月支, 月氏) 및 신하(臣下)인 수많은 별님(星君)들이 있으며, 낮에는 해님이 다스리고 밤에는 달님이 다스리며, 인간의 출생, 생사, 질병 등 인간만사와 가뭄, 비, 천둥, 바람 등 자연현상은 하늘나라 임금님(天帝)의 뜻에 따라 별님(星君)들이 각각 나누어 맡아 다스린다고 믿었다. 이들은 하늘나라 임금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은 결과 지상세계의 임금, 고관, 장군들은 해님, 달님, 별님의 아들이라 믿었다. 즉 임금은 해님의 아들인 용(龍)이, 비왕(裨王)은 달님의 아들인 천마(天馬) 또는 봉황(鳳凰)이, 위대한 장군이나 고관은 별님(星君)의 아들이 각 지상세계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하였거나 또는 사람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독립국의 최고통치자는 해님의 아들이라 칭하였고, 천제(天帝)에 대한 제사는 최고통치자가 주관하였다. 또 재해가 생기면 지상의 임금이 덕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믿었고, 하늘을 관측하는 담당자를 두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하였으며, 큰 별이 떨어지면 임금, 고관 또는 장군이 죽는다고 믿었다. 고기(古記)에는 천해(天海)의 동쪽 땅도 환국(桓國)으로 적혀 있고, 그곳의 임금도 환인(桓因)으로 적혀 있다. 이는 고대의 구려 무리들이 해가 뜨거나 지는 곳도 하늘나라의 일부로 보고, 하늘나라 임금(桓因)이 밤에는 천해의 동쪽 땅에서 쉬다가 아침이 되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정사를 돌본다고 믿은 신앙과 관련이 있다. 고기(古記)에는 구려(九黎) 무리들이 하늘나라(九天, 不, 高)에서 내려온 무리(黎 餘)라는 뜻인 구려(九黎, 句麗), 구환(九桓), 부여(不黎, 夫餘) 또는 고려(高黎, 高麗) 등으로 적혀 있고, 이주하기 전에 살던 곳이 하늘나라(天界)로 적혀 있으며, 구려 무리들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는 것이 하강(下降)으로 적혀 있고, 구려 무리들이 새로 이주한 땅이 구야(九邪) 또는 구주(九州)로 적혀 있으며, 구야 지역의 추장(尊長)이 구간(九干)으로 적혀 있다. 고기(古記)에 의하면 천해의 동쪽에 살던 무리들 중 일부는 갑자년(B.C. 3897)에 환인의 아들 환웅과 같이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로 남하하여 배달국을 세웠고, 무진년(B.C. 2333)에 왕검(王儉)이 구려(九黎) 무리들을 통합하여 배달국 지역에 조선(朝鮮 : 왕검조선)을 세웠다. 구려(九黎)의 역사는 7명의 환인(桓因)이 다스린 환국(桓國), 18명의 환웅(桓雄)이 다스린 배달국(倍達國), 47명의 단제(檀帝)가 다스린 왕검조선(王儉朝鮮) 순서로 이어졌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 기자(箕子) : 기(箕)는 역(易)에서 동방(東方)을 뜻하고, 기자(箕子)는 동방 즉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기(箕) 지역은 동방(番汗지역)에서 온 무리들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만주 기마족은 수시로 중국을 침략하여 점령하였는데,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살았던 수유족(須臾族) 무리들도 중국의 태곡, 상당, 서화 등지를 점령하여 이들 중 일부가 점령지에 잔류해 살았다. 은(殷)나라는 태곡(太谷)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1무리의 우두머리에게 동방에서 온 분이라는 뜻으로 기(箕)라는 작호(爵號)를 내렸는데, 이때부터 이 무리의 우두머리를 기자(箕子)라 불렀고, 이 무리를 기자족(箕子族)이라 불렀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인 B.C. 323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箕詡)가 번한(番汗) 지역을 장악하여 칭왕(稱王)한 나라이다. 즉 기자조선(箕子朝鮮) 지역은 전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이었다. 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은 B.C. 194년에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멸망하였다. 일부 사학자들은 중국의 사서인 상서대전(尙書大傳) 등에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기자가 조선으로 가니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의 후(侯)에 봉하였다는 문구에 근거하여 B.C. 1122년에 조선 지역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세워졌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에 의하면 은나라가 멸망하였을 때 주나라의 영역은 하수(河水) 이남이었고, 하수 이북과 만주 전지역은 만주 기마족의 영역이었으므로, 상서대전 문구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기자조선의 건국시기는 B.C. 1122년이 아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동호(東胡) 등으로 적혀 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은나라가 망했을 때 B.C. 1122년에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는 8년 후(B.C. 1114년) 도로 중국으로 돌아간다.
3) 언파불합(彦波弗哈) :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으로 되어있다.
4) 웅습(熊襲) : 고대에 구주(九州) 웅본(熊本)에 있던 나라.
5) 송화강 유역에 거주한 섬야노(陝野奴)가 무리를 이끌고 마한 몰래 구주(九州)로 이주하여 천왕을 칭하였다가 언파불합 장군에 의해 토벌된다.
6)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 :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협야존(狹野尊) 일면 신무천황이라 적혀있다.
7) <마한세가 상>에는「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8) 수유족(須臾族) :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무리를 말한다.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의 칭호는 서우여(徐于餘)이다. 서우여는 기자(箕子)와 마찬가지로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서우여(徐于餘)의 원래 글자는 "선우여(單于黎)"로서 "선우(單于)"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餘)"는 부여를 뜻하므로, 선우여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9) 22세 색불루 단제부터 43세 물리 단제까지(B.C.1285~B.C.426, 860년간)를 백악산 아사달(農安, 長春)시대라 한다. 초대 단군왕검부터 1908년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