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한단시대 - 제2장 배달국시대(4. 치우천황과 역사의 교훈)
< 한민족의 한단시대 >
4. 치우천황과 역사의 교훈
1) 14대 자오지 한웅 (치우천황)
일명 치우(蚩尤)천황이라 한다. 신시 시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한 치우씨의 후손으로 단군기원전 334년 14대 한웅으로 선출되었다. 배달국 시대는 주로 장자상속이었지만 능력과 신망이 있는 사람은 추대에 의해 천황이 될 수 있었다.
치우란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이다. 치우천황께서는 신시의 옛 위엄을 이어받아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시작하여 널리 베풀고 번영을 이루었다.
천하가 모두 그를 두려워하며 우러러 받들었다. 후세에 치우천황은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며, 구리로 된 투구와 쇠로 된 갑옷을 입고 능히 안개를 일으키며 온누리를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2) 탁록의 함락
거발한 한웅천황께서 신시를 개천한 이래 배달국의 영역과 영향력은 점점 커지면서, 많은 제후국들이 생겨났으며 감히 대적할 자들이 없었다. 또 신성(神聖) 태호복희씨가 신시의 문화를 지나인들에게 전해준 이래 그 수가 점점 불어났다.
원래 배달국의 한웅 할아버지를 비록한 선인들은 잠자고 있는 내면의 신성(神性)을 깨우쳐주기 위해 신시문화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그 동안 세력이 커지면서 욕심이 생겨 점차 신시의 가르침(天道)을 따르지 않는 제후국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수가 불어난 지나인들도 그 수를 믿고 점차 신시를 넘보게 되었다.
드디어 배달국 후기 14대 치우천황은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무도한 자들에게 하늘의 가르침을 따르게하겠다고 마음먹으셨고 대대적인 정벌에 나섰다.
그래서 안으로는 용감한 병사를 양성하고 밖으로는 세상의 변화를 관찰하며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군대를 재편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한해 동안에 연전연승으로 아홉 개의 제후의 땅을 다시 점령했고, 유망의 정권이 쇠약해지며 도(道)가 바로 서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 어렵게 되자, 군대를 보내어 유망을 정벌 ,탁록을 점령하였다.
3) 치우천황과 황제헌원
자오지 한웅 당시 공손헌원이란 이가 있었는데, 그는 신시의 주민인 소전의 후손으로 원래는 동이족이었다. 헌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신시의 가르침에 저항하기 시작한 토착 지나족 백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들의 욕심을 부추겼다.
그는 치우천황이 공상에 입성하여 크게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감히 자기도 천자가 되려는 뜻을 품고, 스스로를 황제라 부르며 치우천황을 공격, 싸움을 걸었다.
치우천황은 그 전에 먼저 항복한 장수-소호를 보내어 탁록에 쳐들어가도록 하고 탁록을 포위하여 헌원의 군사를 멸하였다. 그래도 헌원은 굴복치 않고 10년에 걸쳐 73회나 끊임없이 덤볐으나 끝내는 저항할 능력조차 없게 되었다.
이후 치우천황께서는 정예병을 나누어 보내 서쪽은 예탁의 땅을 지키게 하고 동쪽은 회대의 땅을 취하여 성읍을 삼게하여 헌원이 동쪽으로 도발해 올 수 있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황제헌원은 이로써 홀연히 사라지게 되고 헌원에게로 갔던 유망도 역시 세력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하여 치우천황은 한반도. 만주. 몽고는 물론 회남. 산동성. 하북성. 하남성. 강소성. 안휘성. 북경. 낙양등지를 평정하여 천하는 안정을 얻게 되었다.
☞ 치우천황과 동두철액(銅頭鐵額)
중국의 (운급헌원기)라는 책에는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이마에,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고 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도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 치우는 형제가 8인이 있는데 모두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는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졌다" 함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은 치우천황과 81명의 장수들을 그렇게 본 것이다.
우리 측의 기록을 보면 "치우천황은 집안과 가문에서 장수가 될 만한 인재 81명을 뽑아서 여러 군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고 갈로산의 광석-쇠를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도개(칼), 모득(두 갈래진 창), 대궁(활), 호시(호나무로 만든 화살)를 많이 만들어 탁록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구혼에 올라 연전연승의 기세는 질풍과 같아 만군(萬軍)이 겁에 질려 굴복하였고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쳤다"고 되어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한반도에서의 청동기 시대가 B.C. 10세기 경에, 철기가 쓰여진 지는 BC4세기경 부터" 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치우천황에 관한 중국측과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기록들을 통해서 볼 때, 단군왕검에 의해 고조선을 세우기 천년 전에 벌써 철과 구리를 제련해 원하는 대로 병장기를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또 거발한 한웅께서 신시개천하기 위해 세상에 내려올 때(6천년 전) 한국시대 7대 지위리 한인께서 거울, 칼, 방울의 천부삼인을 내려주셨다는 기록을 보면 배달국때는 물론 한국시대에 이미 청동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음의 선도문화와 함께 인류최초로 청동기와 철기를 사용하는 현실적인 힘이 뒷받침되었기에 유라시아 대륙전반에 걸친 한국. 배달국이 가능했고 단군조선때까지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한단시대의 영역을 따라 청동기와 철기문화가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