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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후예이길 거부하는자 .. 꺼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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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세기

檀君世紀


  古記云王儉父檀雄母熊氏王女辛卯五月二日寅時生于檀樹下有神人之德遠近畏服

  고기(古記)에서 말한다.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雄)1)이고 어머니는 웅씨의 왕녀<母熊氏王女>이며 신묘년(B.C.2370)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年十四甲辰熊氏王聞其神聖擧爲裨王攝行大邑國事

  14세 되던 갑진(B.C.2357)년에 웅씨의 왕<熊氏王>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椑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戊辰唐堯時來自檀國至阿斯達檀木之墟國人推爲天帝子混一九桓神化遠曁是謂檀君王儉在裨王位二十四年在帝位九十三年壽一百三十歲

  무진(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 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의 터<檀木之墟>에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한(九桓)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椑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戊辰元年大始神市之世四來之民遍居山谷草衣跣足至開天一千五百六十五年上月三日有神人王儉者五加之魁率徒八百來御于檀木之墟與衆奉祭于三神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奉詔繼天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身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立都2)阿斯達建邦3)號朝鮮

  무진 원년(戊辰元年 : B.C.2333), 바야흐로 신시의 다스림이 시작되었을 때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며 풀잎으로 옷을 해 입고 맨발로 다녔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 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법규를 도로 찾고<復神市舊規>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이름했다.


  詔曰天範惟一弗二厥門爾惟純誠一爾心乃朝天

  단군왕검은 가르침4)을 내려 말했다.「천범(天範)은 하나일 뿐이니, 그 문은 둘이 아니다. 너희들은 오로지 순수하게 정성을 다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으리라. <心乃朝天>)


  天範恒一人心惟同推己秉心以及人心人心惟化亦合天範乃用御于萬邦

  하늘의 뜻<天範>은 항상 변치 않는 하나이고, 사람의 마음도 알고 보면 하나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살펴보아 자기의 마음을 알면,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도 살필 수 있으리라. 다른 이의 마음을 교화하여 하늘의 뜻<天範>에 잘 맞출 수 있다면, 이로써 세상 어느 곳에서든지 잘 쓰일 수가 있느니라.


  爾生惟親親降自天惟敬爾親乃克敬天以及于邦國是乃忠孝爾克體是道天有崩必先脫免

  사람이 태어남은 조상과 부모에 연유했으며, 그 부모와 조상은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다. 그러므로 부모를 옳게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하늘을 받들어 모시는 것<敬天>이며, 나라에까지도 그 힘이 미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충성이요 효도함이다. 너희가 이 도를 잘 따라 몸에 지닌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화를 벗어날 수 있느니라.


  禽獸有雙弊履有對爾男女以和無怨無妬無淫

  짐승에게도 짝이 있고 다 해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는 서로 화목하며 서로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도 말며, 음란함을 삼가야 하느니라.


  爾嚼十指痛無大小爾相愛無胥讒瓦佑無相殘家國以興

  너희들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면 크건 작건 가림 없이 모두 아프지 않던가? 서로 헐뜯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도운다면 집안도 나라도 다 크게 일어나리라.


  爾觀牛馬猶分厥蒭爾瓦讓無胥奪共作無相盜國家以殷

  너희들, 소나 말을 살펴보아도 다만 서로 먹이를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빼앗지 않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훔치지 않고 함께 일한다면 나라가 다 융성하게 되리라.


  爾觀于虎彊暴不靈乃作孼爾無桀騖以戕性無傷人恒遵天範克愛物爾扶傾無陵弱濟恤無侮卑爾有越厥則永不得神佑身家以殞

  너희들, 호랑이 무리를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여 신령스럽지 못하더니 비천하게 되어 버렸다. 너희가 사람다운 성품을 잃고 난폭하게 날뛰지 않는다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니라. 항상 하늘의 뜻을 받들어 모든 것들을 사랑하여라. 너희는 위태로운 것을 만나면 도울지언정 모욕을 주지 말지니라. 너희가 만일 이런 뜻을 어긴다면 영원히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어 네 한 몸은 물론 집안까지도 다 사라지리라.


  爾如有衝火于禾田禾稼將殄滅神人以怒爾雖厚包厥香必漏爾敬持彛性無懷慝無隱惡無藏禍心克敬于天親于民爾乃福祿無窮爾五加衆其欽哉

  너희가 만일 논에 불을 일으켜 벼들이 다 타버리게 된다면 하늘이 이를 벌할 것이니라. 너희가 아무리 두껍게 싸서 감춘다 해도 그 냄새는 반드시 새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니라. 너희는 항상 바른 성품을 공경스럽게 지녀서 사악한 마음을 품지 말 것이며, 나쁜 것을 감추지 말 것이며, 재앙을 감추지 말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 하늘을 공경하고 모든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로써 끝없는 행복을 누릴 것이나니, 너희 오가의 무리들이여, 이 뜻을 잘 따를 지어다.」(참고 : 檀君勅語)5)


  於是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 尤掌兵馬納斐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이에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6)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7)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8)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書契를 담당하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괘무(卦莁)>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겐 군대(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淳厖)의 다스림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丁巳五十年洪水汎濫民不得息帝命風伯彭虞治水定高山大川以便民居牛首州有碑

  정사 50년(B.C.2284),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쉴 수가 없었다. 제(帝)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물을 다스리게 하고 높은 산과 큰 강을 평정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으니 우수주(牛首州)에 그 비석이 있다.


  戊午五十一年帝命雲師倍達臣設三郞城于穴口築祭天壇於摩璃山今塹城壇是也

  무오 51년(B.C.2283), 임금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혈구(穴口)9)에 삼랑성(三郞城)10)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檀)을 마리산(摩璃山)11)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12)이 바로 그것이다.


  甲戌六十七年帝遣太子扶婁與虞司空會于塗山太子傳五行治水之法勘定國界幽營二州屬我定淮岱諸侯置分朝以理之使虞舜監其事

  갑술 67년(B.C.2267),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13)에서 우사공(虞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14)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15)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庚子九十三年帝在柳闕土階自成草茆不除檀木茂陰與熊虎遊觀牛羊茁浚溝洫開田陌勸田蠶治漁獵民有餘物俾補國用國中大會上月祭天民皆熙皞自樂自此皇化洽被九域遠曁耽浪德敎漸得偉廣

  경자 93년(B.C.2241), 단군께서 버들궁궐에 계셨는데 흙 계단이 절로 생겼고 풀숲은 없어지지 않으니 단목(檀木)이 무성한 그늘에서 곰․호랑이와 더불어 노닐며 소와 양이 크는 것을 보셨다. 도랑을 파고 밭길을 내고 누에를 치도록 권장하며 고기잡이를 가르치니 백성들은 남은 물건들을 나라 살림에 보태었다. 나라 안에는 큰 모임이 있었으니 시월 상달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 모두 기쁨에 넘쳐서 환호하며 스스로 즐겼다. 이로부터 단군님의 교화는 온 누리를 가득 덮어서 멀리 탐랑(耽浪)에 까지 미쳤으니 가르침은 점차로 널리 퍼져 갔다.


  於是區劃天下之地分統三韓三韓皆五加六十四族是歲三月十五日帝崩于蓬亭葬于郊外十里之地萬姓如喪考妣奉檀旂晨夕合坐敬拜常念不忘于懷太子扶婁立

  이에 천하의 땅을 새로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16),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족을 포함하였다. 이 해 3월 15일 단군께선 봉정(蓬亭)에서 붕어(崩御)하시니 교외로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이에 백성들은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 듯 단군님의 기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함께 앉아 경배하며 생각하여 마음속으로 잊지 못하더라. 이에 태자 부루가 새로 단군이 되었다.


  2세 단군 부루 재위 58년(二世 檀君 扶婁  在位五十八年)


  辛丑元年帝賢而多福居財大富與民共治産業無一民飢寒每當春秋巡省國中祭天如禮察諸汗善惡克愼賞罰浚渠洫勸農桑設寮興學文化大進聲聞日彰

  신축 원년(B.C.2240), 단제께서는 어질면서 다복하셔서 재물을 저장하니 크게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함께 산업(産業)을 다스리시니 한 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는 자가 없었다. 봄․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살펴보시고는 하늘에 제를 올려 예를 다하였다. 여러 왕들의 잘잘못을 살피시고 상벌을 신중히 하였으며 도량을 파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며 농사짓고 뽕나무를 심을 것을 권장하였다. 또 기숙사<察>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文化)는 크게 진보하여 그 명성이 날로 떨쳐졌다.


  初虞舜置幽營二州於藍國之隣帝遣兵征之盡逐其君封東武道羅等以表其功

  제순유우(帝舜有虞)가 유주․영주의 두 주를 남국(藍國)17)의 이웃에 두었기 때문에 단제께서 병사를 보내어 이를 정벌하여 그 왕들을 모두 다 쫓아내시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그곳의 제후로 봉하여 그 공을 표창하였다.


  神市以來每當祭天國中大會齊唱讚德諧和於阿爲樂感謝爲本神人以和四方爲式是爲參佺戒其詞曰

  신시 이래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의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함께 노래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여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며 조상에 대해 고마워하였으며 신인(神人)이 사방을 다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게 곧 참전(參佺)의 계(戒)18)가 되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於阿於阿我等大祖神大恩德倍達國我等皆百百千千勿忘於阿於阿善心大弓成惡心矢的成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絃同善心直矢一心同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一衆多矢的貫破沸湯同善心中一塊雪惡心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倍達國光榮百百千千年大恩德我等大祖神我等大祖神

  어아 어아, 우리들 조상님네 크신 은혜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착한 마음 큰 활이고 나쁜 마음 과녁이라,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니 활줄처럼 똑같으며,

  착한 마음 곧은 화살 한맘으로 똑같아라.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 되어 과녁마다 뚫고 지고,

  끓는 마음 착한 마음 눈과 같은 악한 마음.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이라,

  굳게 뭉친 같은 마음 배달나라 영광일세,

  천년 만년 크신 은덕, 한배검<大祖神>이시여, 한배검<大祖神>이시여.


  壬寅二年(紀元95年)帝召少連大連問治道先是少連大連善居喪三日不怠三月不懈朞年悲哀三年憂自是擧俗停喪五月以久爲榮此非天下之大聖其能德化之流行如是傳郵之速者乎二連以孝聞亦見稱於孔子夫孝者愛人益世之本放諸四海而準焉

  임인 2년(B.C.2239), 단제께서는 소련(少連)․대련(大連)19)을 불러 다스림의 길을 물으셨다. 이보다 앞서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었으니, 사흘 동안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석 달 동안 느슨하지 않았고, 한 해 동안 슬퍼 애통해 하였으며 삼 년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다섯 달 동안 상을 치루던 것이 이때부터 풍속이 변하여 오래 될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이라 하지 않을 것이며, 덕으로 교화하면 백성이 이를 따름이 우편 말의 빠름과 같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대련과 소련은 이렇듯 효로서 알려졌으니 공자도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무릇 부모에게 효도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이익 되게 하는 근본이니, 온 세상에 두루 알려 표준으로 삼게 되었다.


  癸卯三年九月下詔使民編髮盖首服靑衣斗衡諸器悉準於官布苧市價無處有二民不自欺遠近便之

  계묘 3년(B.C.2238) 9월, 조서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 쌀 되와 저울 들 도량 형기를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고, 베와 모시의 시장 가격이 서로 다른 곳이 없으며, 백성들이 서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했다.


  庚戌十年四月劃邱井爲田結使民自無私利

  경술 10년(B.C.2229)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않도록 하였다.


  壬子十二年神誌貴己製獻七回曆邱井圖

  임자 12년(B.C.2229), 신지(神誌)인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戊戌五十八年帝崩是日日蝕山獸作隊亂叫山上萬姓慟之甚後國人設祭家內擇地設壇而土器盛禾穀置壇上稱爲扶婁壇地是爲業神又稱佺戒以全人受戒爲業主嘉利人與業俱全之義也太子嘉勒立

  무술 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이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짐승도 무리를 지어 미친 듯 산 위에서 소리를 질렀고 백성들은 심하게 통곡하였다. 뒤에 백성들은 제단을 설치하였으니 집안에 땅을 골라 단을 설치하고 흙 그릇에 쌀을 가득 담아 단위에 올려놓았다. 이를 부루의 단지라고 부르고 업신(業神)으로 삼았으며, 또 완전한 사람이 받는 계명이라고 하여 전계(佺戒)라고도 불렀고, 업주가리(業主嘉利)라 하였으니 바로 사람과 업(業)이 함께 완전하다는 뜻이다. 태자 가륵(嘉勒)이 새로 즉위했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45년(三世檀君 嘉勒  在位四十五年)


  己亥元年五月帝召三郞乙普勒問神王倧佺之道普勒交拇加右手行三六大禮而進言曰

  기해 원년(B.C.2182) 5월, 단제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신왕종전의 도(神王倧佺之道)를 물으셨다. 보륵은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바른손을 올려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20)를 행한 다음에 나아가서 말씀드렸다.


  神者能引出萬物各全其性神之所妙民皆依恃也

 「신(神)은 능히 만물을 이끌어 내어 각기 그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이는 신의 오묘한 바이라 백성들 모두가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王者能德義理世各安其命王之所宣民皆承服也

  왕(王)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서 세상을 다스리며 각기 그 삶을 편안하게 하니, 이는 왕이 베푸는 바이라 백성들 모두가 받들고 따르는 것입니다.


  倧者國之所選也佺者民之所擧也皆七日爲回就三神執盟三忽爲佺九桓爲倧

  종(倧)이란 나라가 가려 선택하는 것이요, 전(佺)이란 백성들이 받들어 행하는 바로, 모두가 7일을 일회로 하여 삼신(三神)에 나아가 맹세하고 세 고을을 전(佺)으로 구한(九桓)을 종(倧)으로 삼습니다.


  盖其道也欲爲父者斯父矣欲爲君者斯君矣欲爲師者斯師矣爲子爲臣爲徒者亦斯子斯臣斯徒矣故神市開天之道亦以神施敎知我求獨空我存物能爲福於人世而已

  그 도(道)란 것은 아비 되는 자 아비다워야 하고, 임금 되는 자 임금다워야 하고, 스승 되는 자 스승다워야 함이니, 아들과 신하와 제자 또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시개천(神市開天)의 도(道)란 또한 신의 가르침으로 나를 알아 홀로 섬을 구하고 나를 비워 세상이 있게 함이니 능히 인간세상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代天神而王天下弘道益衆無一人失性代萬王而主人間去病解怨無一物害命使國中之人知改妄卽眞而

   천신(天神)을 대신하여 천하의 왕이 됨은 도를 넓혀 무리를 유익하게 하고<弘道益衆>, 한사람도 그 성품을 잃지 않게 함이며, 뭇 왕(萬王)을 대신하여 사람을 주관함은 병을 없애고 원통함을 해소하여 어느 것 하나도 그 목숨을 다치지 않게 하려함이니,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망령됨을 고쳐 참으로 나아감<改妄卽眞>을 알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三七計日會全人執戒自是朝有倧訓野有佺戒宇宙精氣粹鍾日域三光五精凝結腦海玄妙自得光明共濟是爲居發桓也施之九桓九桓之民咸率歸一于化

  이리하여 삼칠일을 기한으로 모든 사람이 모여 계(戒)를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朝廷)엔 종훈(倧訓)이 있고 백성들에게는 전계(佺戒)가 있었다. 우주의 정기는 순수하게 온 누리에 내리고, 삼광오정(三光五精)21)은 사람의 머리에 모여 뭉쳐서 깊고 묘한 것을 얻게 되니 저절로 서로 돕게 되는 것이라. 이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며 구한(九桓)에 두루 베풀어지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며 교화되어 하나같이 되었다.


  庚子二年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曰

    


  경자 2년(B.C.2181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眞書)22)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 안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 리 정도 규모의 나라안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土)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신축 3년(B.C.2180),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甲辰六年命列陽褥薩索靖遷于弱水終身棘置後赦之仍封其地是爲凶奴之祖

  갑진 6년(B.C2177), 열양(列陽)23)의 욕살(褥薩)24)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25)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하였다. 뒤에 그를 용서하시고 그 땅을 다스리도록 봉하니 그가 흉노(匈奴)26)의 조상이 되었다.


  丙午八年康居叛帝討之於支伯特夏四月帝登不咸之山望民家炊煙少起命減租稅有差

  병오 8년(B.C.2175),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단제께서는 불함산에 올라 민가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시고는 연기 일어나는 것이 적은 집은 조세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戊申十年豆只州濊邑叛命余守己斬其酋素尸毛犁自是稱其地曰素尸毛犁今轉音爲牛首國也其後孫有陜野奴者逃於海上據三島僭稱天王

  무신 10년(B.C.2173), 두지주(斗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서 소시모리(素尸毛犁)27)라고 했는데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28)이 되었다. 그 후손 가운데 협야노(陜野奴)29)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30)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칭했다.


  癸未四十五年九月帝崩太子烏斯丘立

  계미 45년(B.C.2138) 9월,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했다.


  4세 단군 오사구 재위 38년(四世 檀君 烏斯丘 在位三十八年)


  甲申元年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爲基後云

  갑신 원년(B.C.2137),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理汗)으로 봉했다. 어떤 사람은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 후손이라고 한다.


  冬十月北巡而回到太白山祭三神得靈草是謂人蔘又稱仙藥自後神仙不死之說 與採蔘保精密有關聯間有採得家所傳神異顯靈頗多奇驗云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삼신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으니 이를 인삼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 이때 이후 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알ꞠոոҦƤꘘνҰϼ


  戊子五年鑄圓孔貝錢秋八月夏人來獻方物求神書而去十月朝野別記書于石以公于民

  무자 5년(B.C.2133),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圓孔貝錢>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이 찾아와서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 갔으며 10월엔 조정과 백성의 구별을 돌에 새겨 써서 백성들에게 널리 알렸다.


  庚寅七年設造船于薩水之上

  경인 7년(B.C.2131), 배만드는 곳을 살수(薩水)31)의 상류에 설치했다. (참고)32)


  壬寅十九年夏主相失德帝命息達率藍眞弁三部之兵往征之天下聞之乃服

  임인 19년(B.C.2119), 하(夏)나라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버리니 단제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진(眞)․변(弁)의 3부(部)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참고)33)


  辛酉三十八年六月帝崩羊加丘乙立

  신유 38년(B.C.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구을(丘乙)이 즉위하였다.


  5세 단군 구을 재위 16년(五世 檀君 丘乙  在位十六年)


  壬戌元年命築壇于太白山遣使致祭

  임술 원년(B.C.2099), 명을 내려 태백산에 단(壇)을 쌓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를 올리게 하였다.


  癸亥二年五月蝗虫大作遍滿田野帝親巡田野呑蝗而告三神使滅之數日盡滅

  계해 2년(B.C.2098) 5월, 황충(蝗虫)34)의 떼가 크게 일어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단제께선 친히 황충이 휩쓸고 간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에게 고하여 이를 없애주기를 비니, 며칠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乙丑四年始用甲子作曆

  을축 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하여 책력을 만들었다.


  己巳八年身毒人流漂到東海濱

  기사 8년(B.C. 2092), 인도 사람<身毒人>35)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七月帝南巡歷風流江到松壤得疾尋崩葬于大博山牛加達門被選於衆入承大統

  정축 16년(B.C.2084), 친히 장당경(藏唐京)36)으로 행차하셔서 삼신(三神)의 단(壇)을 봉축(封築)37)하고 많은 한화(桓花)를 심었다. 7월 단제께서 남쪽을 순수하사 풍류강(風流江)38)을 건너 송양(松壤)39)에 이르러 병을 얻어 붕어하시니 대박산(大博山)40)에 장사지냈다. 우가(牛加)인 달문(達門)이 뭇 사람으로부터 뽑혀 대통을 계승하였다.


  6세 단군 달문 재위 36년(六世 檀君 達門 在位三十六年)


  戊寅元年

  壬子三十五年會諸汗于常春祭三神于九月山使神誌發理作誓效訶其訶曰

  무인 원년(B.C.2083)

  임자 35년(B.C.2049), 모든 한(汗)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삼신을 구월산(九月山)에 제사케 하고 신지(神誌)인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사(詞)에 가로되,


  朝光先受地三神赫世臨 桓因出象先樹德宏且深 諸神議遣雄承詔始開天

 「아침해를 먼저 받는 동녘의 땅에 삼신께서 밝히 세상에 임하셨네.

   한인께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시고 덕을 심으시니 넓고 깊게 하시니라.

   뭇 신들이 한웅을 보내고자 의논하니 조서를 받으사 처음으로 개천하셨네.


  蚩尤起靑邱萬古振武聲淮岱皆歸王天下莫能侵

   치우는 청구에 우뚝 서 만고에 무력으로 명성을 떨치니, 회대(淮岱) 지방이 치우천왕에게 돌아오더라. 이에 천하는 능히 넘볼 수 없었더라.


  王儉受大命懽聲動九桓魚水民其蘇草風德化新

   왕검은 대명을 받아, 그의 환성은 구한을 움직이더라. 어수(魚水)의 백성은 이에 되살아나고 바람결에 풀잎이 한결같이 나부끼듯 덕화(德化)는 새롭기만 하더라.


  怨者先解怨病者先去病一心存仁孝四海盡光明

   원한 있는 자 먼저 원한을 풀고 병 있는 자 먼저 제거하며, 한마음으로 오직 어질고 효도함에 마음을 두시니, 사해에는 모두 남김없이 광명이 있어라.


  眞韓鎭國中治道咸維新慕韓保其左番韓控其南巉岩圍四壁

   진한(眞韓)41)은 나라 안을 안정시키고 길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유신되리라. 모한(慕韓)42)은 왼쪽을 보필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에 대비하여 험준한 바윗돌이 사방의 벽을 에워쌈과 같으니라.


  聖主幸新京如秤錘極器極器白牙岡秤榦蘇密郞錘者安德鄕首尾均平位賴德護神精興邦保太平朝降七十國永保三韓義

   성스러운 단군님께서 신경(新京)에 나아가심은 마치 저울추, 저울 그릇과 같음이라. 저울그릇<마한(馬韓)>은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辰韓>는 소밀랑(蘇密郞)43)이라. 저울추<番韓>는 안덕향(安德鄕)44)이니 앞뒤가 균형이 잡혀 평균 이뤄 나란히 있고, 덕을 신뢰하고 신정(神精)을 지키며 나라를 일으켜 태평을 유지하니라. 정사를 하매 70국을 항복시키고 길이 삼한의 뜻을 간직하니라.


  王業有興隆興廢莫爲說誠在事天神

   왕업이 일어났다가는 망하는 법. 흥폐(興廢)를 함부로 말하지 말지니라. 정성은 오직 천신을 섬기는 일에 있나니라」고 하였다.


  乃與諸汗立約束曰凡我同約之人以桓國五訓神市五事爲永久遵守之案祭天之儀以人爲本爲邦之道以食爲先農者萬事之本祭者五敎之源宜與國人共治爲産先講重族次宥俘囚竝除死刑責禍保境和白爲公專以一施共和之心謙卑自養以爲仁政之始也

  마침내 뭇 한(汗)들과 약속을 세우시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와 함께 이를 약속한 사람들은 한국의 오훈(五訓)45)과 신시의 오사(五事)46)를 영원히 준수하기로 한다.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다스림에는 식생활을 우선으로 하나니,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요 제사는 다섯 가르침<五敎>의 근원이라. 마땅히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다스려 다스림을 자산으로 하고 겨레가 소중함을 우선으로 가르친다. 포로와 죄수를 풀어주고 아울러 사형제도를 없애고 책화(責禍)로 경계를 지키고 화백(和白)을 으뜸으로 한다. 오로지 이처럼 하나같이 베풀고 함께 화합하는 마음을 갖고서 겸허하게 낮추며 스스로 수양한다면 어진 정치가 비롯되리라.」라고 하셨다.


  時執盟貢幣者大國二小國二十墟落三千六百二十四

  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을 바쳤던 곳은 대국이 둘이요 소국이 스물이요 부락이 3,624 곳이었다.


  癸丑三十六年帝崩羊加翰栗立

  계축 36년(B.C.2048),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인 한율(翰栗)이 즉위하였다.


  7세 단군 한율 재위 54년(七世 檀君 翰栗  在位五十四年)


  甲寅元年

  丁未五十四年帝崩于西翰立

  갑인 원년(B.C.2047)

  정미 54년(B.C.1994),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우서한(于西翰)이 즉위했다.


  8세 단군 우서한 재위 8년八世 檀君 于西翰(或曰烏斯含)  在位八年


  戊申元年定二十稅一之法廣通有無以補不足

  무신 원년(B.C.1993), 이십 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널리 쓰이게 하며,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도록 하였다.


  己酉二年是歲豊登有一莖八穗

  기유 2년(B.C.1992), 이 해는 풍년이 들어 벼 한 포기에 여덟 개의 이삭이 맺혔다.


  辛亥四年帝以微服潛出國境視察夏情而還大改官制

  신해 4년(B.C.1990), 단제께서는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나서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시고 돌아와 크게 관제를 고쳤다.


  甲寅七年三足烏飛入苑中其翼廣三尺

  갑인 7년(B.C.1987),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47)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고 한다.


  乙卯八年帝崩太子阿術 述立

  을묘 8년(B.C.198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인 아술(阿述)이 즉위했다.


  9세 단군 아술 재위 35년(九世 檀君 阿述 在位三十五年)


  丙辰元年帝有仁德民有犯禁者必曰糞地雖汚降雨露有時置而不論犯禁者乃化其德淳厖之化大行是日兩日竝出觀者如堵

  병진 원년(B.C.1985), 단제께서는 어진 덕이 있으시사 백성이 금지하는 바를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릴 때도 있는 법이다」하시며 그 죄지은 자를 그냥 놔두시고는 벌하지 않으셨으니, 죄를 지었던 사람도 마침내 그 덕에 감화되어 버렸다. 이에 잘 조화된 교화가 크게 떨쳐졌다. 이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나와 이를 보는 자 마치 넓은 울타리 같았다.


  丁巳二年靑海褥薩于捉擧兵犯闕帝避于常春創新宮于九月山南麓命遣于支于栗等討誅之後三年還都

  정사 2년(B.C.1984), 청해(靑海)의 욕살 우착(于捉)이 군대를 일으켜서 궁성을 침범하니 단제께서는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의 남쪽 기슭에 창건하게 하셨다.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에 명령하여 이들을 토벌하여 죽여 버리도록 하시고는 삼 년 뒤에야 서울로 되돌아 오셨다.


  庚寅三十五年帝崩牛加魯乙立

  경인 35년(B.C.195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牛加)인 노을(魯乙)이 즉위하였다.




  10세 단군 노을 재위 59년(十世 檀君 魯乙 在位五十九年)


  辛卯元年始作大囿養畜外之獸

  신묘 원년(B.C.1950), 처음으로 큰 동물 우리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을 길렀다.


  任辰二年親臨墟落存問駕停野外賢者多歸之

  임진 2년(B.C.1949), 몸소 마을로 행차하셔서 안부를 물으셨는데,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니 현자들이 많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乙未五年宮門外設伸寃木以聽民情中外大悅

  을미 5년(B.C.1946), 궁문 밖에 신원목(伸冤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니 멀리 사는 이들까지 기뻐했다.


  丙午十六年東門外十里陸地生蓮不咸臥石自起天河神龜負圖而現圖如柶板渤海沿岸金塊露出數量十有三石

  병오 16년(B.C.1935), 동문 밖 십 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더니 질 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절로 일어섰다. 천하(天河)에서 거북이(神龜)가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바로 윷판과 같은 것이었다. 발해의 연안에서 금덩이가 나왔는데 수량이 13섬이었다.


  乙丑三十五年始置監星

  을축 35년(B.C.1916), 처음으로 감성(監星)을 두었다.


  己丑五十九年帝崩太子道奚立

  기축 59년(B.C.1892),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11세 단군 도해 재위 57년(十一世 檀君 道奚 在位五十七年)


  庚寅元年帝命五加擇十二名山之最勝處設國仙蘇塗多環稙檀樹擇最大樹封爲桓雄像而祭之名雄常

  경인 원년(B.C.1891), 단제께서는 오가에게 명을 내려 열 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國仙)48)의 소도(蘇塗)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둘러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像)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雄常)49)이라고 이름했다.


  國子師傳有爲子獻策曰惟我神市實自桓雄開天納衆以佺設戒而化之天經神誥詔述於上衣冠帶釰樂效於下民無犯而同治野無盜而自安擧世之人無疾而自壽無歉而自裕登山而歌迎月而舞無遠不至無處不興德敎加於萬民頌聲溢於四海有是請

  이때 국자랑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50)가 계책을 올려 말하길,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는 실로 한웅천왕께옵서 개천(開天)하시고 무리를 거두심에 온전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세워서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위에서 조술하신 바요 의관대일(衣冠帶釰)은 기꺼이 밑으로 본을 보이시는 것이니, 백성들은 범하는 일없고 함께 다스려져 들에는 도적 떼도 없이 스스로 평안하였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 병도 없이 장수하며 주리는 이 없이 풍요로우니, 산에 올라 노래부르며 달을 맞아 춤추었습니다. 먼 곳이라고 이르지 못하는 곳 없고 흥하지 않는 곳 없게 되었으니 덕이 넘치는 가르침은 만백성에게 주어지고,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뜨거운 정(情)이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冬十月命建大始殿極壯麗奉天帝桓雄遺象而安之頭上光彩閃閃如大日有圓光照耀宇宙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如一眞神有圓心持天符印標揭大圓一之圖於樓殿立號居發桓三日而戒七日而講風動四海

  겨울 10월에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셨으니 매우 장려하였다. 돌아가신 천제 한웅의 모습을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 위에는 광채가 번쩍번쩍하여 마치 큰 해와 같았다.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비추며 박달나무 밑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니 하나의 살아있는 신이 둥근 원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의 인을 가지고 대원일(大圓一)의 그림을 누전에 걸어 놓으셨으니 이를 일컬어 거발한(居發桓)51)이라 하였다. 사흘동안 재계하시고 이레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위풍이 사해를 움직이듯 했다.


  其念標之文曰

  이를 간절한 마음으로 쓴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天以玄黙爲大其道也普圓其事也眞一

「하늘은 깊고 고요함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온 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地以蓄藏爲大其道也效圓其事也勤一

  땅은 가득 품고 있음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人以知能爲大其道也擇圓其事也協一

  사람은 살펴 아는 것에 큰 뜻이 있어 그 도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이 고르고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故一神降衷性通光明在世理化弘益人間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내려와<一神降衷>,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性通光明>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在世理化>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弘益人間)」


  仍刻之于石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丁巳二十八年設所而聚方物以閱珍奇天下之民爭獻陳設如山

  정사 28년(B.C.1864), 장소를 마련하여 사방의 물건들을 모으사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다투어 (방물을) 헌납하여, 진열한 것이 산처럼 쌓였다.


  丁卯三十八年徵民丁皆爲兵送選士二十人于夏都始傳國訓以示威聲

  정묘 38년(B.C.1854), 백성들 가운데서 장정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선사(選士) 20명을 하(夏)나라 서울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乙亥四十六年設作廳于松花江岸舟楫器物大行于世三月祭三神于山南 供酒備膳致詞而醮之是夜特賜宣醞與國人環飮觀百戱罷仍登樓殿論經演誥顧謂五加曰自今以後禁殺放生釋獄飯丐竝除死刑內外聞之大悅

  을해 46년(B.C.1846), 송화강 기슭에 관청을 세우니 배와 그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물건이 크게 세상에 퍼졌다. 3월에 삼신을 산의 남쪽에서 제사지냈으니 술과 음식을 갖추어 올리고 치사를 드리며 제사를 올렸다. 그날 밤 특별히 널리 술을 하사하시어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술잔을 돌려가며 술을 마시면서, 여러 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나자 마침내 누각에 오르셔서 천부경에 대해 논하시고 삼일신고를 강연하시더니<論經演誥> 오가(五加)를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이제부터는 살생을 금하고 방생하여 옥문을 열고, 떠도는 사람에게 밥을 주어 살 수 있도록 하며 사형제도를 없애노라.」

  이에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丙戊五十七年帝崩萬姓慟之如考妣喪三年憂四海停聲樂牛加阿漢立

  병술 57년(B.C.1835), 단제 붕어하시니 만백성이 이를 슬프게 여김이 마치 부모의 상을 당함과 같아서, 삼 년 동안 근신하며 온 누리에 음악, 노래 소리가 끊겼다. 뒤를 이어 우가(牛加) 아한(阿漢)이 즉위했다.


  12세 단군 아한 재위 52년(十二世 檀君 阿漢 在位五十二年)


  丁亥元年

  戊子二年夏四月一角獸見於松花江北邊秋八月帝巡國中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刻歷代帝王名號而傳之是金石之最也後滄海力士黎洪星過此題一詩曰

  정해 원년(B.C.1834),

  무자 2년(B.C.1833), 여름 4월 외뿔 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 단제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碑)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말로 금석문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뒤에 저 창해역사(蒼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은 이 비석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읊었으니, 다음과 같다.


  村郊稱弁韓別有殊常石臺荒躑躅紅字沒苺苔碧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홀로 뛰어난 돌 하나 있었네

  받침은 깨지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生於剖判初立了興亡夕文獻俱無徵此非檀氏跡

  다듬어져 처음 생겼을 때 그대로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하나도 없지만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乙卯二十九年命菁莪褥薩丕信西沃沮褥薩高士琛貊城褥薩突盖封爲列汗

  을묘 29년(B.C.1806), 청아(靑莪)의 욕살인 돌개(突蓋)를 봉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戊寅五十二年帝崩牛加屹達立

  무인 52년(B.C.1738),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13세 단군 흘달 재위 61년(十三世 檀君 屹達(一云代音達) 在位六十一年)


  己卯元年

  甲午十六年定州縣立分職之制官無兼權政無越則民無離鄕自安所事  絃歌溢域

  기묘 원년(B.C.1782).

  갑오 16년(B.C.1767), 주와 현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의 한계를 정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는 일이 없고 정치는 법칙을 넘는 일이 없도록 하였으니 백성은 고향을 떠나는 일없이 스스로 일하는 곳에서 편안하여,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넘쳤다.


  是歲冬殷人伐夏其主桀請援帝以邑借末良率九桓之師以助戰事湯遣使謝罪乃命引還桀違之遣兵遮路欲敗禁盟遂與殷人伐桀密遣臣智于亮率畎軍合與樂浪進據關中邠岐之地而居之設官制

 이 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흘달 단제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은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어명을 내려 군사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하나라 걸왕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사를 보내 길을 막고 약속을 깨려고 하였다. 이에 은나라 사람들과 함께 하나라 걸왕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畎)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樂浪)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邠)․기(岐)의 땅52)에 웅거하며 관청<관제(官制)>을 설치하였다.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號爲國子郞國子郞 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花郞

  무술 20년(B.C.1763),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의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도 불렀다.


  戊辰五十年五星聚婁黃鶴來棲苑松

  무진 50년(B.C.1733), 오성이 모여들고<五星聚婁>53)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己卯六十一年帝崩萬姓絶食而哭不絶仍命釋囚俘禁殺放生過歲而葬之牛加古弗立

  기묘 61년(B.C.1722),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백성들 모두 밥도 먹지 않았으며 곡성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명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지낸 후 우가인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14세 단군 고불 재위 60년(十四世 檀君 古弗  在位六十年)


  庚辰元年

  乙酉六年是歲大旱帝親禱天祈雨誓告于天曰天雖大無民何施雨雖膏無穀何貴民所天者穀天所心者人也天人一體天何棄民乃雨滋穀濟化以時言訖大雨立降數千里

  경진 원년(B.C..1721).

  을유 6년(B.C.1716), 이 해에 큰 가뭄이 있었다. 단제께서 몸소 하늘에 기도하여 비오기를 빌며 말씀하시길,

 「하늘이 크다하나 백성이 없으면 무엇에게 베풀 것이며 비는 기름지다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은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는가? 이제 비는 곡식을 기름지게 할지며 때 맞춰 구제하게 하소서」

  라고 하니, 말을 끝내자 큰비가 수 천리에 삼대처럼 내렸다.


  辛酉四十二年九月枯木生芽五色大鷄生於城東子村家見者誤指爲鳳

  신유 42년(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乙亥五十六年遣官四方査計戶口總一億八千萬口

  己卯六十年帝崩代音立

  을해 56년(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억8천만구였다. 기묘 60년(B.C.1662), 단제 붕어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15세 단군 대음(혹은 후흘달) 재위51년(十五世 檀君 代音54)(一云後屹達)  在位五十一年)


  庚辰元年殷主小甲遣使求和是歲改八十稅一之制

  경진 원년(B.C.1661),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辛巳二年洪水大漲民家多被害帝甚憐恤移其栗於蒼海蛇水之地均給于民冬十月養雲須密爾二國人來獻方物

  신사 2년(B.C.1660), 홍수가 크게 일어나 민가가 크게 해를 입었다. 이에 단제께서는 매우 불쌍하게 여기셔서 곡식을 창해사수(蒼海蛇水)의 땅으로 옮겨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셨다. 겨울 10월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사신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己丑十年帝西幸弱水命臣智禹栗採金鐵及膏油秋七月虞婁人二十家 來投命定着于鹽水近地

  기축 10년(B.C.1652), 단제께서는 서쪽으로 약수(弱水)로 가시더니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하여 금철(金鐵) 및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루국(虞婁國) 사람 20인이 투항해 오니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하였다.


  丁未二十八年帝登太白山立碑刻列聖群汗之功

  정미 28년(B.C.1634), 단제께서는 태백산에 오르사 비석을 세워 역대 단군들의 이름과 역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己未四十年封皇弟代心爲南鮮卑大人

  기미 40년(B.C.1622), 단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봉했다.


  庚午五十一年帝崩牛加尉那立

  경오 51년(B.C.1611), 단제께서 붕어 하시니 우가(牛加)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16세 단군 위나 재위58년(十六世 檀君 尉那 在位五十八年)


  辛未元年

  戊戌二十八年會九桓諸汗于寧古塔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而亨之五日大宴興衆明燈守夜唱經踏庭一邊列炬一邊瓊舞濟唱愛桓歌愛桓卽古神歌之類也先人指桓花而不名直曰花愛桓之歌

  신미 원년(B.C.1610)

  무술 28년(B.C.1583), 구한의 여러 한(汗)들이 영고탑(寧古塔)55)에 모여 삼신(三神)과 상제에게 제사지냈으니 한인, 한웅, 치우 및 단군왕검을 모시었다. 닷새 동안 크게 백성과 더불어 연회를 베풀고 불을 밝혀 밤을 지새며 경을 외우고 마당 밟기를 하였다. 한쪽은 횃불을 나란히 하고 또 한쪽은 둥글게 모여 서서 춤을 추며 애한(愛桓)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애한이란 곧 옛날 신에게 올리는 노래의 종류를 말함이다. 선인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有云山有花山有花去年種萬樹今年種萬樹春來不咸花萬紅有事天神樂太平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고 올해 또 만 그루 심었지

  불함산에 봄이 오면 온 산엔 붉은 빛

  천신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戊辰五十八年帝崩太子余乙立

  무진 58년(B.C.1553),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17세 단군 여을 재위68년(十七世 檀君 余乙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庚申五十二年帝與五加歷巡國中至蓋斯城之境有靑袍老人獻賀曰長生仙人之國樂爲仙人之氓帝德無愆王道無偏民兮隣兮不見愁苦責禍以信管境以恩城兮國兮不見戰伐

  기사 원년(B.C.1552)

  갑신 52년(B.C.1501), 단제께서는 오가와 함께 나라를 돌아보셨는데, 개사성(蓋斯城)의 근처에 이르니 푸른 도포를 업은 노인이 있어 하례를 드려 말했다.

 「오래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며 선인의 백성이 되어 살고 있지만 단제의 덕은 두루 미쳐 그르침이 없고 왕의 다스림은 편벽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고통․책화(責禍)를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써 경계를 관할하고, 은혜로써 성도 나라도 전쟁을 겪지 않았거니.」


  帝曰嘉納嘉納朕之修德日淺恐無以報民之與望

  이에 단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짐이 덕을 닦은 지 오래지 못해 백성들의 바램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게 여기노라.」


  丙子六十八年帝崩太子冬奄立

  병자 68년(B.C.1485),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18세 단군 동엄 재위49년(十八世 檀君 冬奄 在位四十九年)


  丁丑元年

  丙申二十年支伯特人來獻方物

  정축 원년(B.C.1484)

  병신 20년(B.C.1465), 지백특(支伯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乙丑四十九年帝崩太子緱牟蘇立

  을축 49년(B.C.1436),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구모소(緱牟蘇)가 즉위하였다.


  19세 단군 구모소 재위55년(十九世 檀君 緱牟蘇 在位五十五年)


  丙寅元年

  己丑二十四年南裳人入朝

  병인 원년(B.C.1435)

  기축 24년(B.C.1412), 남상인(南裳人)56)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己未五十四年支離叔作周天曆八卦相重論

  기미 54년(B.C.1382),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庚申五十五年帝崩牛加固忽立

  경신 55년(B.C.1381), 단제 붕어하시고 우가인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20세 단군 고홀 재위43년(二十世 檀君 固忽 在位四十三年)


  辛酉元年

  辛未十一年秋白日貫虹

  신유 원년(B.C.1380)

  신미 11년(B.C.1370) 가을, 하얀 태양이 무지개를 뚫었다.


  丙申三十六年修築寧古塔作離宮

  병신 36년(B.C.1345),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을 지었다.


  庚子四十年共工工忽製獻九桓地圖

  경자 40년(B.C.1341), 공공(共工)인 공홀(工忽)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癸卯四十三年四海未寧而帝崩太子蘇台立

  계묘 43년(B.C.1338),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21세 단군 소태 재위 52년(二十一世 檀君 蘇台 在位五十二年)


  甲辰元年殷主小乙遣使入貢

  갑진 원년(B.C.1337), 은나라 왕 소을(小乙)(21대 왕, B.C.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庚寅四十七年殷主武丁旣勝鬼方又引大軍侵攻索度令支等國爲我大敗請和入貢

  경인 47년(B.C.1291), 은나라 왕 무정(武丁)57)이 귀방(鬼方)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크게 패하여 화친을 청하며 공물을 보내왔다.


  壬辰四十九年蓋斯原褥薩高登潛師襲鬼方減之一群養雲二國遣使朝貢於是高登手握重兵經略西北地勢甚强盛遣人請爲右賢王帝憚之不允屢請乃許號爲豆莫婁

  임진 49년(B.C.1289),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58)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一群國)과 양운국(養雲國)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하였다. 이에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단제는 이를 위태롭게 여겨 허락치 않았으나 거듭하여 이를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여 두막루(豆幕婁)라 불렀다.


  乙未五十二年右賢王高登薨基孫索弗婁襲爲右賢王帝巡狩國中南至海城大會父老祭天歌舞仍召五加與之議傳位自謂老倦于勤欲委政於徐于餘 環薩水百里而封之命爲攝主號曰奇首右賢王聞之遣人勸帝止之帝綜不聽

  을미 52년(B.C.1286), 우현왕 고등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단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海城)에 이르러 부로(父老)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하늘에 제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는 오가(五加)를 불러 제위를 물려주는데 대해 의논하셨는데 이제는 늙어서 제위를 지키기가 어렵다 하시며 정치를 서우여(徐于餘)59)에게 맡기고 싶어 하셨다. 이에 살수(薩水)의 땅 백 리를 둘러보시고 이를 그에게 봉하시사 명을 내려 섭주(攝主)로 하여 기수(奇首)라 부르게 하였다. 우현왕(右賢王)60)은 이를 듣고 사람을 보내 단제에게 권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으나 단제는 종내 이를 듣지 않으셨다.


  於是右賢王率左右及獵戶數千遂卽位于夫餘新宮帝不得已傳玉冊國寶廢徐于餘爲庶人帝隱於阿斯達以終是歲伯夷叔齊亦以孤竹君之子遜國而逃居東海濱力田自給

  이에 우현왕(右賢王)은 주변 좌우 신하와 사냥족<獵戶>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단제도 할 수 없이 옥책(玉冊), 국보를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고, 단제께서는 아사달에 은거하시다가 마침내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역시 고죽군(孤竹君)61)의 자손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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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웅(檀雄) : 18대 거불단(居佛檀) 한웅


2) 입도(立都) : <삼성기전 상편>에는 설도(設都)로 기록되어 있다.


3) 건방(建邦) : <삼성기>에는 개국(開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4) 단군왕검의 가르침 : 단군팔조교(檀君八條敎)라고 부른다. 65자로 되어 있다.


5) 단군칙어(檀君勅語) : 단군께서 개국하실 때 모든 백성들에게 내린 가르침의 말씀이다.

1. 너희는 지극히 거룩하신 한얼님의 자녀됨을 알라.

    2. 너희들 영원토록 자손이 계승할 때에 터럭 만한 것이라도 다침이 없고 이즈러짐이 없어라.

3. 너희는 한 겨레로 일체가 되어 의좋고 정답게 서로 손을 잡고 같이 살아라.

    4. 너희는 조심하라. 조심하라. 내 땀방울이 적시우고, 내 피가 물들인 강토에 혹여나 더러운 때 묻힐세라.

    5. 너희는 네가 해야 할 일은 너희 손으로 하게 하라. 그리하여 각기 너희 할 직분을 지켜라. 너희 할 책임을 견뎌라.

    6. 네가 가질 것을 남에게 주지 말고, 네가 할 일을 남이 하게 하지 말라.

    7. 너희는 이 나라 기슭 한 군데도 빠짐없이 하늘 은혜와 땅의 이익 두루 받았음을 알라. 너희 것 삼아 쓸데로 써서 너희 생활이 항상 풍족하라. 넉넉하거라.

    8. 너희는 내가 오늘 훈칙한 이 알림이 할 일로써, 천하만민에게 고루히 알리어 주거라.

  ※ 단군칙어가 전해진 내력 : 단군칙어가 세상에 전해지게 된 것은 대진국, 즉 발해의 시조인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덕분이다. 대야발은 왕으로부터 단기고사(檀記古史)를 편찬하라는 명을 받고, 민족의 광범위한 이동과 함께 사해(四海)에 널리 퍼져있는 모든 고적(古蹟)을 직접 답사하였다.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찾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그는 각지의 사서(史書)와 석실, 장서(藏書), 고비(古碑)와 많은 사람들의 사평(史評)을 참고하고, 먼 나라(오늘날 터어키)까지 2번이나 돌아보며 검증하였다. 단군칙어는 그후 삼십 년만에 편찬된 단기고사에 전해지는 단군왕검의 가르침이다.


6) 성조(成造) : 집을 관장하는 신을 成造大君이라 하여 상량신으로 받듦.


7) 고시(高矢) : 고시레 혹은 고수레.


8) 신지(臣智) : 臣智는 무관의 직책, 神誌의 誤記인 듯함.


9) 혈구(穴口) : 지금의 강화도.


10) 삼랑성(三郞城) : 강화군 길성면에 있는 고성.


11) 마리산(摩璃山) : 본이름은 리(머리)산이다.


12) 참성단(塹城壇) : 강화도의 祭天壇.


13) 도산(塗山) ; 중국 안휘성 회원현을 흐르는 회화의 동쪽 강변, 일명 당도산, 이른바 도산회맹으로 널리 알려진 땅.


14) 분조(分朝, 九黎分政) : 왕검조선(王儉朝鮮) 때 중국의 회대(淮岱) 지방에 둔 분조(分朝)이다. 배달국(倍達國) 때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동부와 북부 지방을 점령한 후 회대(淮岱) 사이에 웅거(雄據)하였다. 그 뒤 왕검(王儉)이 배달국 지역에 왕검조선을 세운 후 지역을 3분하여 만주중앙은 진한(辰汗)이, 연해주, 한반도, 대마도, 구주 등 동쪽은 마한(馬汗)이, 중국북부지방과 만주남부지방 등․서․남쪽은 번한(番汗)이 각각 다스리고, 중국동부에 있는 회대 지방에는 분조를 두고 다스렸는데, 이 분조를 구려분정(九黎分政)이라 불렀다. 구려분정의 치소는 산동성 제성현 동남쪽에 있는 "낭야성(琅耶城)"이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5) 우순(虞舜) : 五帝의 하나인 제순유우(帝舜有虞)를 말한다.


16) 삼한관경(三韓管境)제를 말한다.


17) 남국(藍國) : 흔히 연나라라고 하나 구이(九夷)가운데 남이도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18) 참전(參佺)의 계(戒) : 고구려의 재상 을파소(乙巴素)가 지은 참전계경(參佺戒經).


19) 소련(少連)․대련(大連) : 중국고전이 말하는 하늘이 낸 효자, 곧 천종지효(天從之孝)라고 효의 대표요 상징처럼 취급하는 인물들.


20) 삼육대례(三六大禮) : 천제나 제사 또는 임금님께 드리는 우리 고유의 배례법.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리를 조아린다.


21) 삼광오정(三光五精) : 三光은 해․달․별을 뜻하며, 五精은 五行의 精이다.


22) 참글(眞書) : 배달국 시대의 鹿圖文으로 비정.


23) 열양(列陽) : 요동


24) 욕살(褥薩) : 지방장관


25) 약수(弱水) : 곤륜산에서 흘러내리는 강. 부력이 약하여 기러기 털도 가라앉는다고 한다.


26) 흉노(匈奴) : 고대에 중국인들이 만주(滿洲) 기마족(騎馬族)이 중국을 자주 침범하여 중국인들에게 해(害)를 끼친다고 하여 만주 기마족을 멸시하여 부른 명칭이다. 이 흉노는 넓은 의미로는 만주의 모든 기마족을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몽고 방면에 살던 기마족만 가리킨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는 만주 기마족이 여러 가지 명칭으로 적혀 있는데, 중국에 해(害)를 끼친다고 흉노(匈奴)로, 천신(天神)을 숭배하는 무리라고 하여 불여(不黎, 夫餘)로, 직업을 기준으로 하여 유목족은 호(胡)로, 농어업족은 예(濊)로, 사냥족은 맥(貊)으로,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 조선(朝鮮)으로 각각 적혀 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7) 소시모리(素尸毛犁) : 송화강 유역 만주 동부지방으로 비정


28) 우수(牛首) : 고대에 요하 동쪽 만주동부 지방에 살았던 농경족 무리들이 소(牛)의 얼굴을 한 농사의 신(神)을 숭배하여 그 지도자를 소마리(牛頭.牛首)라 부르고, 이 무리들이 살았던 지역도 소마리라 불렀다. 이 소마리라는 말은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소시모리(素尸毛犁) 또는 수밀이(須密爾)로, <일본서기>에는 소시모리(曾尸茂梨)로 적혀 있다. 우수주 또는 소시모리라는 명칭은 춘천, 경상도 등지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만주동부 지방에 살았던 무리들 중 일부가 춘천, 경상도 등지로 이주하여 살면서 전에 부른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는 소(牛)가 "素(소)"로도 적혀 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기(蓋鹵王紀)에는 고국원왕을 죽인 사실이 "素"의 머리를 베었다고 적혀 있고, <일본서기>에는 송화강 유역에서 이주한 일본의 국조신(國祖神) 이름이 "素잔鳴尊"으로 적혀 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9) 협야노(陜野奴) : <일본서기>에는 신대(神代)에 소잔명존이라 적혀있다. 섬야노(陝野奴)라고 기록된 사서도 있다.


30) 삼도(三島) : 일본 열도를 지칭한다.


31) 살수(薩水) : 청천강이 아닌 중국의 난하(灤河)로 비정(比定)


32) <마한세가 상>에 「경인년에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의 남해안이다.」는 기록이 있다.


33) <규원사화>에는 「가륵조 때에 하왕이 실덕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때에 하왕 후상(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34) 황충(蝗虫) : 메뚜기과의 벌레.


35) 인도 사람<身毒人> : 신독(身讀)은 인도의 옛 이름


36) 장당경(藏唐京) :

  - 삼국유사의 장당경에 관한 기록

  「호를 단군왕검이라 하고 제요도당의 즉위 50년 경인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다시 서울을 백악산(또 다른 이름으로는 궁골산 또는 금미달)으로 옮기니 어국이 1,500년이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겨 갔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신이 되시니 단군의 수는 1,908세를 누렸다.」

  - 이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은 평양도읍시대, 백악산 아사달시대, 장당경시대, 아사달 신선시대로 나눌 수 있다. 세 번째의 장당경시대는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 무왕이 들어서서 기자가 조선에 온 뒤라 하였으니, 대략 B.C.111년 경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일붕 서경보 박사는 치우천왕께서 티벳에 있는 장당경에 도읍하여 물경 800년 동안 왕국을 유지하였다고 하며, 티벳 지방을 여행하여 이를 확인했다고 발표한 바가 있다.


37) 봉축(封築) : 하늘에 지내는 제를 봉제(封祭)라 하고, 땅에 지내는 제를 선제(禪祭)라 한다. 봉제는 종래 중국의 천자만이 지내고 천하의 제후들은 고작 선제만이 가능했다고 했다. 천자라는 용어나 개념도 우리에게서 나왔으니 중국의 채옹(蔡邕)이라는 학자는《독단(獨斷)》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天子之號稱 始於東夷 夫天母地 故曰天子」 즉「천자의 호칭은 동이에서 시작된 바요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천자(하늘의 아들)이라 한 것이다.」 채옹은 마치 《삼국유사》의 고조선조 《고기(古記)》의 기록이라도 본 듯 정확하게 우리 민족의 천민신앙을 묘사하고 있다. <하늘 아들>이라 자부하는 우리의 민족신앙처럼 귀중한 것은 없다.


38) 풍류강(風流江) : 평양 강동군의 동복쪽을 도는 비류강으로 비정.


39) 송양(松壤) : 평양 강동군의 옛 이름.


40) 대박산(大博山) : 평양시 강동군 문흥리에 소재, “북한에서 단군릉”이 발견됨.


41) 진한(辰汗. 辰韓) : 진한(辰汗)은 B.C. 2333년부터 B.C. 238년까지 왕검조선(王儉朝鮮)을 다스린 임금의 명칭이고, 진한(辰韓)은 한(韓) 지역에서 천제의 아들(辰)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다. 사서(史書)에 진한(辰韓)으로 적혀 있는 나라는 B.C. 194년에 토착 마한인(馬韓人)들이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들을 한수(漢水) 남쪽으로 쫓아버리고 평양(平壤)에 세운 나라(樂浪)와 B.C. 194년부터 지금의 경상도 동부지방에 존재한 진한연맹(辰韓聯盟)이다. 사서(史書)에는 박혁거세 이전에도 지금의 경상도 동부지방의 명칭이 진한(辰韓)으로 적혀 있으나, 박혁거세 이전에는 진한(辰韓)이 마한왕(馬韓王)에게 복속하고 있었고, 고대에는 복속국이 함부로 천제(天帝)의 아들을 뜻하는 진(辰)자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진한(辰韓)으로 불린 시기는 B.C. 194년부터가 아니고 박혁거세가 신라를 건국하여 진한(辰韓) 지역을 장악한 후 마한왕(馬韓王)에게 복속하지 않고 부터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42) 모한(慕韓) : 막한(幕韓), 말한(馬韓)을 뜻한다.


43) 소밀랑(蘇密郞) : 진한(辰韓)의 도읍지 아사달(왕검성), 송화강 하얼빈 지역).


44) 안덕향(安德鄕) : 하북성 당산시에 있는 관평(關平)의 동북 70리에 위치, 난하가 흐르는 곳.


45) 한국(桓國)의 오훈(五訓)

     일왈(一曰) 성신불위(誠信不僞) : 성실하고 신의 있어 속이지 않으며

     이왈(二曰) 경동불태(敬動不怠) : 공경하고 행함에 게으르지 않고

       * 경근불태(敬勤不怠)? : 부지런함을 받들어 게으르지 않고<개천록>

     삼왈(三曰) 효순불위(孝順不違) : 효도하고 순종함에 위배됨이 없고

     사왈(四曰) 염의불음(廉義不淫) : 염치있고 의리 있어 음란치 않고

     오왈(五曰) 겸화불투(謙和不鬪) : 겸손하고 화목하여 다투지 않는다.

46) 신시의 오사(五事) : 우가(牛加)는 농사를 주관하고, 마가(馬加)는 목숨을 주관하고, 구가(狗加)는 형벌을 주관하며, 저가(豬加)는 병을 주관하며, 양가(羊加)(혹은 계가(鷄加)라 함)는 선악을 관장함을 말한다.


47) 세 발 달린 까마귀<三足烏> : 태양을 상징한다.


48) 국선(國仙) : 화랑의 전국 사령관.


49) 웅상(雄常) :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에 「삼한에 옛 풍속이 있는바 모두 10월 상순에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낸다. 땅에 제사지냄을 방구(方丘)라 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사지냄은 각목(角木)이라 하나니, 산에 웅상(雄常)의 상(像)을 만듦은 모두 그 유법(遺法)이다.」,「주해에 이르기를「때에 큰 나무를 모시어 한웅의 신상(神像)이라 하고 이에 경배한다. 신령스런 나무는 이를 웅상(雄常)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상(常)은 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니라.」는 기록이 있다.


50) 유위자(有爲子) : <단기고사>에 기록된 바, 12세 단군 아한(전 1833) 때 선인 유의자가 한민족의 성쇠(盛衰)에 관해 논한 것에서 그 원인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요약하면, 자국의 문화(文化)와 이상(理想)과 역사(歷史), 그리고 문자(文字)와 선조(先祖)를 잃은 민족은 필경 쇠하고야 만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유위자의 분석은 지금의 우리를 너무나 부끄럽게 하고 있다.


51) 거발한(居發桓) : 개국시조에게만 사용하는 특별한 이름으로서 신앙적 의미가 내포된 신격화된 호칭이며, 천․지․인을 하나로 정한다는 뜻의 호칭이다.


52) 빈(邠)․기(岐)의 땅 : 중국 섬서성 위수의 분지에 있는 빈현(邠縣)과 기산현(岐山縣)을 말한다. 역대 도읍이인 장안(長安)과 가까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여기며 관중(關中)이라고도 한다.


53) 오성취루(五星聚婁) : 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 등 육안으로 보이는 다섯 별이 한자리에 모이는 '오행성 결집현상'이다. 그런데 한민족의 뿌리인 단군조선에 대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기성 사학계로부터 위서(僞書)라는 `누명`을 쓰고 버려져 왔던 상고사 서적들에 대한 복권 작업이 젊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3세 흘달 단군 무진 50년(BC 1,733)의 오행성의 결집 현상(五星聚婁)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역으로 추적하여 컴퓨터 합성 기법으로 시각화했다.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 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는 학계에서 방치해 왔던 상고사 서적들의 내용을 천문학적인 방법론으로 검증한 결과 상당 부분이 당시의 실제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약 6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들의 연구는 상고사 서적들에 나타난 당시의 천문 현상 기록을 당시의 실제 천문 현상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상당히 과학적인 근거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서적은, 단군조선 시대에 대한 풍부한 역사 기록과 함께 당시의 천문 현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는 <단기고사>와 <한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이다. 이 서적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또 일부 내용이 과장돼 있다는 이유로 기성 사학계로부터 사료로서 인정받지 못해 왔다. 그러나 재야 사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이야말로 일제 식민사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통박해 왔다. 재야 사학계는, 일제 때 단군조선 말살 운동에 앞장섰던 일인 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가 "조선의 고대사 관련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라고 주장한 것을 기성 사학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해 온 것이다. 조선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한 소국의 역사로 개악하고자 했던 일인 학자들에게, 적어도 고대 조선이 대륙을 사이에 두고 중국 민족과 자웅을 겨뤘던 고대 강국이었다고 묘사하고 있는 이들 상고사 서적들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박교수와 라박사가 연구의 원본으로 삼은 <단기고사>와 <단군세기> 에는 일식 현상에 대한 기록이 모두 10군데, 이 한군데, 큰 썰물에 대한 기록이 한군데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천체 현상은 물리 법칙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전개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특정 시점의 행성들 위치를 알면 슈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이 행성들의 과거와 미래의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가능하다. 연구 결과, 이 사서들이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무작위 적으로 날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오행성 결집 현상에 대한 기록이었다. <단기고사>나 <단군세기> 기록에 따르면, 제13대 단군인 홀달단제 50년, 즉 BC 1733 년에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에 모인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돼 있다. 즉 '戊辰 五十年 五星聚婁' 라는 한 줄의 글귀로, 무진 50년에 다섯 개의 별이 婁星 근처에 모였다는 뜻이다. 박교수팀은 기록에 나타난 BC 1733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백50년 사이에 오행성의 결집이 일어난 시점을 샅샅이 조사했다. 조사 결과는 처음에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기록에 나타난 BC 1733 년으로부터 바로 1년 전인 BC 1734 년에 매우 뚜렷한 형태로 오행성이 서로 아주 가까워져 있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이 해 7월 13일 초저녁 다섯 개의 별은 지상에서 보아 약 10도 이내의 거리에 모여 있었다. 이 날은 왼쪽 하늘에 초승달이 비스듬하게 떠 있어, 별빛이 한층 더 찬란하게 빛났었다. B.C.1733 년을 기점으로 하여 5백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오행성이 이보다 가깝게 모인 시기는 그보다 약 1백80년 전인 B.C.1953년 2월 25일 새벽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교수는 "기록 연수보다 1년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약 3천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간 계산법 차이를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은 수치이다." 라고 말했다. 만약 후대의 누군가가 이 현상을 작위적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이것이 서로 맞아떨어질 확률은 박교수의 계산 결과 0.007%, 즉 "세계 지도에서 임의의 한 장소를 지목했을 때 그것이 대한민국일 가능성" 에 비유될 정도로 매우 희박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번 연구 결과 박교수팀이 내린 결론은, 이 사서들이 그 동안 일인 학자들이나 국내 기성 사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후대의 누군가에 의해 전적으로 날조된 것만는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실은 왜곡하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확인하기도 어렵지만, 천문 현상은 윤색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사서들의 상당 부분은 단군 조선 당시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라고 박교수는 말했다. 박교수팀의 연구는 그 동안 이들 사서의 내용에 대해 상당 부분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기성 학계의 두터운 벽 때문에 실제 연구 과정에서 제외시킬 수밖에 없었던 고조선사 연구 학자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윤내현 교수 (단국대 사학) 는 "그 동안은 주로 중국 사서들에 단편적으로 나타난 기록들에 의존해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를 계기로 서지학자들이 참여하여 이 사서들의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검토한다면, 단군조선사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했다.


54) 대음(代音) : <규원사화>에는 벌음(伐音)으로 기록되어 있다.


55) 영고탑(寧古塔) : 만주 길림성 명안현에 있다. 영고특, 영고대라고도 한다. 발해 당시의 오경의 하나로 발해 유물의 보고.


56) 남상인(南裳人) : 남장인(南掌人)의 오식인 듯, 남장은 지금의 운남성 변두리에 있던 나라이면 섬라국(暹羅國)을 말함이다.


57) 무정(武丁) : 은나라 22대 왕(B.C.1339~1280)


58) 귀방(鬼方) : 은나라 때의 작은 나라


59) 서우여(徐于餘) : 왕검조선(王儉朝鮮)의 번한(番汗)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 우두머리의 칭호이다. 기자(箕子)와 마찬가지로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서우여(徐于餘)의 원래 글자는 "선우여(單于黎)"로서 "선우(單于)"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를, "여(餘)"는 부여를 뜻하므로, 선우여는 부여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서우여(徐于餘), 서여(胥餘), 수유(須臾)는 후에 선우여(單于餘) 발음이 변한 것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60) 우현왕(右賢王) : 색불루를 말한다.


61) 고죽군(孤竹君) : 단군조선의 번한(番韓)에 속한 나라. 고죽국은 지금의 영평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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