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의 역사(기록중심) >
1.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 무진년에 건국되었다.
▶ 근 거 :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임금이 즉위한 해(서기전 2333년, 무진년)에 고조선을 건국했다.(출전 : 삼국유사, 제왕운기)
- 삼국유사에는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왕검 한 사람만 기록되어 있다.
-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記 : 한단고기중)에는 47명의 단군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2. 단군조선은 초기부터 청동기를 사용했던 선진 법치국가형태로 건국되었다.
▶ 근 거
① 국가인가 아닌가 첫 번째 판단기준은 청동기
청동기의 의미 : 석기를 사용하던 시대에 청동기를 소유했다는 것은 2차 세계대전때 미국이 원자탄을 소유했던 것과 비슷한 위력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 지역에서는 보통 청동기 시대에 국가가 출현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적지가 발굴되었다는 것(서기전 2500∼3000년)은 그 +시기 그 장소에 국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단국대 윤내현 교수)
② 국가인가 아닌가 두 번째 판단기준은 법률
옛날 중국(이라 알려진) 상(=은)나라 왕실의 후예인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그때 이미 고조선에는 팔조금법이라는 법이 있었다(출전 : 중국 漢書 지리지, 윤내현 저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기자(箕子)의 고조선 망명기록은 중국 상서대전, 사기에 나와 있다.
기자(箕子)는 은왕실의 후예(箕라는 곳에 봉해진 제후)이며, 조국인 은나라가 주나라에게 멸망당하자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한 것이다.
기자의 망명시기는 은나라 멸망 직후인 서기전 1100년경인 고조선 중기에 해당한다.
결국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한 서기전 1100년경에 이미 팔조금법이 시행되고 있었으므로, 제정된 시기는 그보다 앞섰다는 말이 된다.
3. 고조선의 강역은 최소한 한반도와 만주의 전지역이다.
서쪽은 중국 북경 근처의 난하( 河), 북쪽은 어로구나하, 동북쪽은 흑룡강, 남쪽은 한반도 남부해안이 경계였다.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 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계와 경제구조 속에서 2,300여 년간 생활했다)
4. 단군조선은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선진문화국가였다.
한반도와 만주지방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적지는 서기전 2,5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 근 거
- 전남 영암군 장천리,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방사성 탄소측정기에 의해 측정한 결과 서기전 2,500만년으로 확인되었음
- 평양의 단군릉에서 출토된 금동유물은 서기전 3,000년경의 것임.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 문화개시 연대(2,500년∼3,000년)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리두 문화 :서기전 2,200년), 시베리아(최고 청동기 문화는 미누신스크 문화, 서기전 1,700년경), 중앙아시아(서기전 2,200년 이후)보다 앞선다. 곧 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국가형태로 단군조선은 시작되었다.
▶ 개선점
지금까지 국사교과서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서기전 300년에서 1,000년경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단군조선이 개국되었다는 기원전 2,333년은 당연히 신석기시대였다고 믿어졌고, 그 시대가 신석기시대라면 그 사회는 국가로 볼 수 없으며, 단군조선은 국가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제 교과서의 이 부분은 바뀌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에서 청동기 문화가 전파되어 왔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청동이 유물의 발굴과 그 연대측정은 오히려 거꾸로 고조선의 강역인 한반도와 만주에서부터 황하, 시베리아, 중앙아시아로 전파되었음을 말해준다. 즉, 단군조선으로부터 중국의 황하나 아시아로 문화가 전파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5. 일제의 단군조선 말살정책
단군사화를 믿을 수 없는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은 일제의 단군조선 말살정책 때문이다.
(1) 일제는 우리 겨레의 정체성과 사상의 뿌리를 말살하려고 고조선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고조선이 건국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는 단군사화를 조작된 신화라고 몰아 부쳤던 것이다.
(2) 일제는 조선을 합병한 후 전국을 뒤져 20만 권의 민족 자주사서, 선가서 등을 소각했다.(일제의 조선사편수회 식민사학자 금서룡은 "조선의 고대사 관련자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밖에 없다. 그 밖의 사서는 사서가 아니라 위서다"고 주장하였다)
(3) 일제 어용학자들은 단군신화와 단군조선에 대해 기록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고려말기에 쓰여진 점을 들어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단군신화와 고조선을 허위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6. 고조선의 신분제도
단군조선의 중앙에는 단군의 직할국이 있었다.
▶ 신시(神市) : 단군조선의 중앙에 있는 종교적 성지로 정신적 중심지, 仙人들이 거주, 단군이 주재하는 종교의식이 행해졌다.
▶ 아사달(阿斯達) : 단군조선 전체의 통치자인 단군이 거주하는 수도
▶ 국읍(國邑) : 거수국의 거수(일종의 제후)가 거주하는 도읍이며, 거수국에도 하느님에 대한 의식을 주관하는 천군이란 종교지도자가 있었고, 소도(蘇塗)라는 종교성지가 있었다.
▶ 단군은 최고의 종교지도자겸 정치지도자(제정일치시대, 신권정치시대), 일반 읍, 소읍 : 피지배 계층
▶ 신시의 거주민, 단군 씨족, 거수 씨족은 지배계층이었고, 일반 읍의 거주민들은 피지배 씨족이었다.
▶ 고조선 유적지
서포항, 초도, 오동, 범의구석, 미송리, 입석리, 승리산, 양두와, 망해둔, 서산단, 소영자 등 (그림자료 : 고조선 우리의 미래가 보인다, 윤내현 167쪽)
7. 고조선의 경제제도
(1) 고조선의 조세제도는 20분의 1 세법이었다.
(근거 : 고조선에서는 20분의 1의 세금으로 징수했다.- 맹자(孟子) - 고자(告子)편, 윤내현)
맹자는 단군조선에서 이렇게 낮은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도 나라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규모가 큰 사원이나 궁궐, 종묘 등을 짓지 않고, 관직도 많이 설치하지 않았으며, 지배귀족이 검소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홍익인간 이념) 반면, 전국시대 당시 중국은 10분의 5의 세법이었다.
(2) 고조선에 대한 경제기록
▶ 고조선에서는 성을 쌓고, 해자를 팠으며,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시경(詩經) 한혁(韓奕)편, 윤내현)
▶ 벼농사 : 경기도 일산, 김포 유적지에서 서기전 3,000∼2,000년경의 볍씨가 출토된 것은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삼베 : 삼베실(평남 궁산리), 삼베조각 출토(자강도 토성리 유적)
▶ 고조선의 수공업 : 청동기와 철기
- 단군조선의 대표적 청동기는 비파형 동검
중국 요령성 여대시 강상 무덤(874점 : 특히 청동실로 만든 장식품은 탁월한 금속가공 기술을 보여줌 = 직경 0.25밀리미터의 가는 구리실로 짠 것 = 오늘날의 기술로도 쉽지 않다고 함, 단국대 윤내현 교수), 누상무덤(288점)
- 아시아 최고의 청동기 철기문화
▶ 단군조선의 무역
- 요령성 여대시 강상 유적 :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 생산되는 보배조개 출토(의미 : 남중국 혹은 그 이남지역까지 교역했음- 윤내현 교수)
- (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숙신의 사신들이 여러차례(순임금-서주시대) 중국을 방문했다. 이때, 호( )나무로 만든 활( 矢)과 화살, 돌화살촉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중국 기록인 죽서기년(竹書紀年), 사기(史記)
- 주의 무왕이 은나라와 싸워 승리를 하고, 서주를 건국하자 숙신의 사신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활, 화살, 돌화살촉을 예물로 가지고 갔는데, 무왕은 이때 받은 화살에 "숙신이 가져온 화살"이란 글귀를 새겨, 그의 큰 딸인 태희(太姬)가 결혼할 때 기념품으로 주어 가보로 보존하도록 하였다.(국어(國漁)중 노어(魯漁), 윤내현 교수)
- 막대한 외화 보유국 : 연나라의 명도전이 5,000점(자강도 운송리 유적), 4,280점(평남 청송로 동자구 유적), 4,000점(자강도 길다동 유적) 그외 수백∼3,000점 등의 명도전 출토
명도전 이외 포전, 반량전 등 중국화폐가 많이 출토되었음(의미 : 엄청난 양의 중국화폐 출토량은 당시 단군조선이 국제무역을 통해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달게 해주는 것이다 - 윤내현 교수, 단군조선은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운 나라였다는 반증)
- 전국시대 연나라가 고조선 지역과 교역을 하여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
(3) (진제국의 뒤를 이어 건국된) 서한은 고조선과의 국경이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게 되자 국경을 서한쪽으로 이동시켰다 (사기, 조선열전)
(의미 : 한나라가 고조선과의 국경을 지키기 어려워 서한쪽으로 국경을 이동할 정도로 고조선의 국력은 매우 강한 나라였다.(윤내현, 이때는 위만조선시대)
8. 중국인들의 고조선 이주 기록
전제국 말기부터 한나라 건국 때까지 많은 중국인들이 고조선의 서부 변경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많다.<위략(魏略),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삼국지(三國志), 와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의미 : 고조선의 경제와 사회가 낙후되어 있어서 사람이 살기에 불편하였다면 많은 중국인들이 이주해 오지 않았을 것. 즉, 고조선 사회의 경제와 사회가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다는 방증(윤내현 교수)>
9. 고조선의 의복
- 예 사람들은 남녀 모두가 깃이 둥근 옷을 입고 은으로 만든 꽃으로 장식을 하였다.
- 고구려 사람들은 공공모임에 참석할 때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만든 치레거리를 사용했다.(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예전)
- 부여 사람들은 국내에 있을 때는 흰색의 옷을 숭상하여 흰 배로 만든 큰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의미 : 예, 고구려, 부여는 원래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풍속은 고조선의 것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조선의 경제생활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을 것임)
- 옷감 : 삼베, 모직, 명주의 생산
- 고조선에서 명주(비단=실크)가 생산되었다.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쌈을 했다. 서기전 1100년경(고조선 중기) 그 이전부터 누에치고 명주 생산했음(다량의 가락바퀴와 바늘 출토)>
10. 고조선의 음식문화
- 나무 그릇 사용
-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때, 그 지역의 농민들은 변(邊 : 대나무로 만든 그릇)과 두(豆 :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한서 지리지, 윤내현 = 매우 위생적인 생활을 했다는 의미)
- 부여 사람들은 조와 두라는 그릇을 사용하였고, 예 사람들은 변과 두라는 그릇을 사용하여 먹고 마셨다.(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전, 예전)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상황을 말한 것. 예 부여는 고조선의 거수국, 그러한 풍속은 고조선으로부터 이어졌던 것(윤내현)>
- 숫가락 유물
함경북도 서포항 유적 청동 수저 2점, 범의 구석 유적 뼈 수저 2점, 초도 고조선 문화층 뼈 수저 1점 출토 = 일찍부터 위생적인 음식문화를 이룩했다는 의미)
- 시루 유물
초도 유적과 범의 구석 유적의 질시루 유물, 정백동 8호 무덤의 청동 시루 = 익히고 끓인 것 뿐 아니라 쪄서 먹기도 했음. = 떡 = 수준높은 음식문화생활의 의미
- 소금생산(동옥저-후한서 동옥저전)
11. 단군조선의 주거생활
(1) 건물은 반지하, 장방형 : 긴 변과 짧은 변의 비율은 1:1.4의 황금비율
(2) 지붕은 짚, 풀, 진흙(자연친화 재료)
(3) 온돌 사용
12. 단군조선의 풍속
▶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때, 당시 고조선의 풍속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고조선의 부인들은 행실이 단정하고 신의가 있으며, 음탕하지 않다."(한서지리지)
▶ 고조선 사회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 세 가지(최치원의 난랑비문)
(1) 집안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유가)
(2) 처신을 하는데 일을 억지로 만들어 하지 않고, 행동을 하되 말을 앞세우지 않으며(=도가)
(3)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불가)
유가, 도가, 불가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의 기본사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후에 유가, 도가, 불가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 불, 도교의 사상들의 원형은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윤내현)
풍류도에는 유, 불, 선 삼교가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최치원)
▶ 8조금법(禁八法) <태백일사 삼한관경 본기, 번한세가 하>
(1) 남을 죽이면 같이 죽여서 다스린다.<相殺以當時償殺>
(2) 남을 다치게 하면 곡식으로 배상케 한다.<相傷以穀償>
(3)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남자는 신분을 무시해 버리고는 그 집의 노비가 되게 하고, 여자는 계집종이 되게 한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를 훼손시킨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하게 한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하게 노동하지 않는 자는 부역을 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행동을 하는 자는 태형으로 다스린다.<邪淫者笞刑>
(8) 사기치는 자는 훈계 방면하나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하고자 하는 자는 각자 50만전을 내야 했다. 그리고 설사 죄를 면하여 일반 백성이 되었더라도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혼인의 대상으로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군조선에는 도둑이 없어 대문이나 방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한서 지리지, 윤내현)
13. 단군조선의 민주성
(1) 부여에는 영고, 고구려에는 동맹, 예에는 무천, 한에는 5월제, 10월제 등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이때에는 나라안의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밤낮없이 음식을 먹고 술마시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부여, 고구려, 예, 한은 모두 단군조선의 거수국= 단군조선의 계승문화일 것)
☞ 특정계층만이 아니라 계층을 초월하여 남녀노소 모든 사람이 천제를 지낸후 축제를 즐겼다.
중국에서는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신분이 다르면 관, 혼, 상, 제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차별되는 규정이 있어 이를 지켜야 했다. 심지어 훗날, 공자는 이런 차별화 된 규범을 "禮"라며 극구 찬양했다.
(2) 한(韓) 사람들은 옷을 입고 모자 쓰기를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일이 있어 군(郡)에 갈 적에는 모두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한다.(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韓전", 윤내현)
- 하호(下戶)는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노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귀족에게 종속되어 농사를 짓던 종속농민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입은 옷은 이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하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착용하는 옷과 모자를 하호들이 빌려서 착용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매우 적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중국에서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韓의 풍속을 말한 것이다. 한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으므로 단군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차별이 적었을 것이다. 고대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고조선 사회에는 신분의 분화가 심해졌겠지만, 가능하면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회전반에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이 사회주도 사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윤내현)
14. 단군조선의 실제적 힘-청동기와 철기
(1) 청동기
청동의 발명과 사용은 인류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은 획기적인 것이다.(황금색 찬란함과 강도는 핵무기를 처음 개발했을 때의 위력과 비교될 정도)
- 중국의 황하보다 수 백년 앞선 서기 2,500백년경의 청동기 문화(단군릉 유물은 서기 3,500년)
- 초기국가인 단군조선이나 은나라가 그렇게 넓은 강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배층이 소유하고 있던 청동기의 위력이 크게 작용했던 것.
- 구리의 용해점은 1083도로 무르다 → 강한 금속을 얻기 위해 합금기슬 발명
- 청동은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고 그 밖의 몇 가지 원소를 합금한 것
- 청동의 합리적 합금비율은 구리 80∼90%와 주석 10∼20% 정도인데, 구리와 주석의 합금비율에 따라 청동의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단군조선에서는 용도에 따라 합금비율을 달리 하였다
- 청동에 아연을 적당히 배합하면 합금의 색깔과 유동성을 조절할 수 있다. 아연을 의도적으로 주입하여 청동기를 주조한 것은 한국 청동기만의 특징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단군조선의 청동주조 기술이 매우 높았던 증거 : 일반적으로 청동은 구리의 함량이 높으면 경도는 낮아지는 반면 기포가 생기기 쉽다. 따라서 청동의 비율이 높은 단검의 경우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쉽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단검의 경우 현미경 관찰에서 기포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입자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 단군조선의 구리광 유적 -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던 지금의 내몽고 자치구 임서현 대정에서는 서기전 1,200백년경의 동광이 발견되었다.
(2) 철기
- 단군조선 후기에 철기 출현(서기전 8세기)
(단군릉의 경우 서기전 3천년전, 치우천황의 동두철액, 에밀레종, 鐵자의 고문자)
· 순철의 용해점은 섭씨 700∼800도에서 환원시작, 1,200도에서 액체가 됨(선철=주철)
산화철의 환원으로 얻어지는 철=연철=두드려 이물질을 제거, 단조하여 철기를 만들어야 함
· 연철+탄소 추가, 선철-탄소 일부제거, 강철을 얻는 발전된 방법은 선철을 보다 높은 온도(섭씨 1,350도 이상 섭씨 1,500도 정도)로 가열하여, 탄소와 그밖의 원소들을 연소시키는 방법으로 제련하는 것
- 단군조선 유적지 철기유물 시험분석 결과 연철, 선철, 강철이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 강철은 강도에 따라 연강(손칼), 반연강(창), 반경강(노동도끼), 극경강(무기도끼)까지 다양하였다.
· 단군조선에서는 강철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이미 열처리 기술을 활용하였다.
☞ 현미경 관찰에 의한 분자구성 : 세죽리 유물은 두 번 열처리 기술
- 철생산, 가공을 위해서는 좋은 철재료와 송풍장치가 있어야 한다.
(1) 제철로 유적지(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 서기전 2세기의 제철로 발견
· 같은 시기의 서구 제철로 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더 잘 만들어진 것이었다.
(2) 송풍장치 유적지(경기도 가평군 마장리) : 야철용 송풍토관의 파편 출토
· 서구에서 선철을 널리 이용한 것은 서기 14세기경부터였다.
(선철로부터 강철을 얻는 발전된 제련방법을 사용한 것도 서기 14세기부터였다. 그전에 사용했던 강철은 연철을 단조하여 얻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민족은 이보다 훨씬 빠른 고조선시대에 이미 연철과 선철을 제련하였으며, 진보된 방법으로 강철도 제련하여 사용하였다.
(단군조선의 철에 대한 지식과 가공, 기술문화가 매우 이르고 높았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 돌을 이용한 침술은 동방에서 기원했다(산해경, 윤내현)
(서포항, 오동 등 단군조선 유적지에서 뼈로 만든 침 출토. 숭실대학교 박물관에는 청동침의 주물틀이 소장되어 있다)
· 주나라 말기 선왕때,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왕실을 방문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때 단군은 서주 선왕의 생질녀를 아내로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시경(詩經), 한혁 편)
· 단군조선 시기에 중원에서는 요, 순, 하, 은, 주, 춘추전국, 진제국, 한나라, 초가 명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