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st

블로그 이미지
단군의 후예이길 거부하는자 .. 꺼져주시길
by InsertCoin

TAG CLOUD

  • Total hit
  • Today hit
  • Yesterday hit

< 북부여와 열국시대 >


1. 열국 출현의 배경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 병진원년(B.C. 425)에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진한이 삼조선을 통괄하면서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을 다스렸다. 3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설명)

이러한 제후국들은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이 각각 망함에 따라 국토가 분열되고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북방 제후들이 자웅을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가 10여 개국이 세워져 약 2세기간에 걸쳐 열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열국중 종주국 격인 북부여는 진조선이 폐관하기 일년 전인 임술년(B.C. 239)에 종실(宗室)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하였다. 을미년(B.C. 86)에는 동부여(가섭원부여)가 분리되고, 동부여에서 남부여가 분리되고, 계해년(B.C. 58)에는 고추모(고주몽)가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 비류백제, 온조백제 등이 건국되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이 성장·발전하면서 열국이 정비되었고, 서기 3, 4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등이 만주와 북중국 일대 고토(故土)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2. 북부여(北夫餘)의 건국

해모수(解慕漱)는 그의 선조가 고리국(藁離國) 사람으로 47대 고열가 단군 57년(B.C. 239)에 송화강(松花江) 유역 웅심산(熊心山)에서 군사를 일으켜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을 점거해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했다. 연호를 고구려라 하고 북부여를 세우니 고열가 단군이 계해 58년(B.C. 238)에 제위를 버리고 아사달(阿斯達 : 현재의 하르빈으로 추정)로 들어갔다.

이에 진조선은 5가(五加)가 6년 동안 공화정치를 하다가 기사년(B.C. 232)에 해모수가 번조선(番朝鮮)의 왕인 기비(箕丕)와 결탁하여 오가(五加)들을 회유하여 공화(共和)의 정치를 철폐하고 단군으로 추대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 "<고구려비기>에 보면 900년에 미치지 못하여 80대장(당의 이적의 나이)이 있어 이를 멸한다"고 하였는데,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부터 900년을 거꾸로 계산하면 서기전 232년이 되는데 이 해가 바로 고열가 단군께서 폐관한 후 오가(五加)들에 의해 간신히 유지되어 오던 진조선이 완전히 문을 닫고 해모수가 단군으로 추대된 해인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를 합하여 고구려의 건국년대로 보았다. 왜냐하면 고주몽(高朱蒙)은 해모수의 4대 손으로 해모수→고진(高辰 : 해모수의 둘째아들)→고모수(高慕漱 : 본명은 불리지(弗離支), 고진(高辰)의 손자)→고주몽으로 이어지는 혈통을 가졌으며, 동부여(가섭원부여 : 해모수계)에서 탈출하여 졸본부여(동명계)로와 6세 단군 고무서(5세 단군 고두막(동명)의 태자)의 부마가 되어 그 대통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창건하였기 때문이다.


3. 낙랑국(樂浪國)의 건국

B.C.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왕 정(秦王 政 : 진시황)을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이 저격하나 실패로 끝난 후 B.C. 209년에 진숭의 난이 일어나 혼란해지자 연(燕), 제(薺), 조(趙)나라의 백성들이 번조선(番朝鮮)으로 망명해와 이들을 상하운장(上下雲障)에 나누어 두고 장군을 파견해 감독하게 하였다.

이 당시 진(秦)나라는 전국시대의 연(燕), 조(趙),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을 단시간에 연결, 보수하여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았는데 그 동쪽 끝은 산해관 부근의 갈석산(碣石山)으로 진왕 정(진시황)과 호해(진의 2대 왕)가 다녀갔으며 이곳을 요동(遼東)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때 진나라는 장성밖에 요동외요(遼東外邀)를 설치, 이곳과 번조선 사이에는 상하운장(上下雲障)이라는 완충지대가 있었다. 즉 상하운장은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와 육율하 사이로 지금도 그곳에는 황지(荒地)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데 이 당시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중전소동하이다.

B.C. 206년 진(秦)을 멸망시킨 항우는 전국에 16명의 왕을 봉했다. 그 중에 한광을 요동왕(遼東王), 장다를 연왕(燕王)에 봉했는데 후에 장다가 한광을 멸하고 B.C. 202년에 한(漢)나라가 장다를 멸하여 중국을 통일한 후에 노관을 연왕(燕王)에 봉했다. 이로써 한나라는 요동고새(遼東故塞 : 산해관)로 경계를 삼았다. 이 당시의 패수는 난하이다.

B.C.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衛滿)은 새(塞 : 산해관)→패수(浿水)→상하운장→왕검성의 경로로 번조선으로 와서 망명을 요구했으나 해모수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크게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모시고 중국에서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아둔 상하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해 주었다.

위만의 세력이 비대해 짐에 위협을 느낀 최숭(崔崇)은 이 해 겨울에 낙랑(樂郞)으로부터 재물을 싣고 바다를 건너 막조선(莫朝鮮)의 도읍이었던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러 낙랑국(樂浪國)을 세웠다. 이 당시 이곳에는 진조선이 B.C. 238년에 망한 이후 막조선이 쇠약해져 그 일부는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고 잔류세력은 낙랑국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북부여 제2세 모수리 원년(B.C. 194)에는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번조선(番朝鮮)을 멸망시키자 그 왕 기준(箕準)은 바다로 달아나고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卓)을 받들어 월지(月支)에 이르러 중마한(中馬韓)을 세웠으며, 변(弁)·진한(辰韓)도 역시 각각 자기들이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한편 동사년표(東史年表)에는 기준이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파하고 금마군(익산)에 도읍을 정한 후 죽자 그 아들인 탁(卓)이 무신년(B.C. 193)에 마한의 시조인 무강왕(武康王)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번조선이 위만에게 멸망당한 후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세우고 만주와 요동에서 이동해 온 진한(진조선의 유민), 변한(번조선의 유민)을 다스린 것으로 볼 수 있다.


4. 졸본부여(卒本夫餘)의 건국

북부여 제4세 고우루(혹은 해우루) 계유 13년(B.C. 108)에 한(漢)의 무제(武帝)는 우거(右渠 : 위만의 손자)를 쳐서 멸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하고자 많은 군사로 사방으로 침입해 왔다. 이 당시 한(漢)의 육군은 요동(遼東 : 산해관)에서 출발하였고 해군은 제(齊 : 산동반도)로부터 북쪽으로 발해(渤海)를 건너 공격해 왔다.

여기에 참전한 한의 장수들 중에 순체, 공손수, 위산은 사형 당하였고 섭하는 전사하였으며 양복은 폐서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한 명도 후(侯)에 봉해진 자가 없고 우거도 망하였으니 양쪽이 다 패한 전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우거의 압제 하에 있었던 번조선의 유민들로서 한(漢)이 우거를 멸하자 위만조선의 북쪽에 있던 고리국(藁離國)에 근거를 둔 동명(東明 : 북부여 5세 단군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침략군을 격퇴한 것이다.

현 사학계에서는 위만조선이 망한 후에도 이들과 상대한 조선이 엄존하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여기서 조선은 동명 고두막한(高豆幕汗)이 계유년(B.C. 108)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를 말한다. 왜냐하면 당시 졸본부여는 한나라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5. 동부여(가섭원부여)의 건국

북부여 제4세 고우루(혹은 해우루) 계유 13년(B.C. 108)에 한(漢)의 무제(武帝)가 우거(右渠 : 위만의 손자)를 쳐서 멸하고 사군(四郡)을 두고자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키자 고두막한(高豆幕汗)이 의병을 일으켜 물리쳤다. 고두막한은 고우루(혹은 해우루)에게 도읍을 옮겨 떠날 것을 요구하자 고우루가 병을 얻어 죽고 동생인 해부루(解夫婁)가 왕위에 올랐으나, 을미년(B.C. 86)에 고두막한에게 쫓기어 통하(通河)의 물가 가섭원(갈사나 : 길림방면, 지금의 훈춘)으로 도성을 옮겼는데 이를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東夫餘)라고 한다.


6. 고구려의 건국

임인년(B.C. 79), 고구려의 시조 고추모(고주몽)는 해모수의 3대 손인 고모수(高慕漱 : 본명은 불리지(弗離支), 해모수의 둘째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와 하백녀 유화(宥和) 부인과의 사이에서 동부여(가섭원부여 : 해모수계)에서 태어났다. 임술년(B.C. 59), 동부여의 사람들이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죽이려 하자 졸본부여(卒本夫餘 : 동명계)로 도망 오게 된다.

고무서(高無胥 : 북부여 6세 단군)의 사위(둘째 딸 예씨(禮氏)와 결혼)가 되어 대통을 잇게 되나 하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므로 다시 동남쪽으로 도망, 비류수 상류에 이르니 이곳에 있던 소서노(召西奴)가 아버지 연타발(延陀渤)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해부루왕의 서손(庶孫) 우태(優台)의 아내가 되어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을 낳은 후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고추모(고주몽)와 결혼하였다. B.C. 58 고추모(고주몽)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扶芬奴)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고구려를 건국했다.


7. 동옥저, 북옥저, 남옥저 및 서옥저

동옥저는 고구려와 개마대산(개마고원)의 동쪽으로 큰 바다에 연해 있으며 서북으로는 읍루, 부여와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예맥과 접해 있으며, 5천호로 동북으로는 좁고 서남으로는 천여 리이다. 동옥저는 함흥지역에 있다가 A.D. 56년 고구려에 멸망당했다.

북옥저(北沃沮)는 치구루라고도 부른며 남옥저(南沃沮)와 8백여리 떨어져 있으며 북쪽은 읍루와 접해 있었다. <요사지리지>, <대진국본기>, <성경통지>에서는 해성(海城)을 남옥저로 보고 있으며, <고구려국본기>에서는 장춘(長春)을 북옥저로 보고 있는데 북옥저는 B.C. 28년에 고구려에 멸망당하였다.

한편 <단군세기>에는 서옥저(西沃沮)가 나타나 있다. 서옥저는 현재 요하 중류의 서쪽 지역으로 전한(前漢) 때에는 B.C. 107년에 현도군(玄 郡)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즉 <삼국지> 동옥저조에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고 한 것은 바로 서옥저를 말하는데 현 사학계에서는 동옥저로만 보고 있다.


8. 예맥(濊貊)

예(濊 : 동예)는 남에 진한을, 북에 고구려, 옥저(동옥저)를, 서에 낙랑(낙랑국)과 접했으며, 동쪽은 큰 바다로 2만호이다. 이러한 동예(東濊)를 현 사학계는 단단대령(單單大嶺)을 개마고원으로 보아 낙랑군(樂浪郡)의 동부지역에 있던 영동(嶺東)의 예(濊 : 7현)로 생각하고 있는데 실제 단단대령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영동의 예는 의무려산과 요하 사이의 해안지역에 있던 낙랑군으로 A.D. 30년에 서부 낙랑에서 왕조의 난이 일어났을 때 동부 낙랑의 예(濊)가 한나라에서 이탈되기도 한다.

이러한 예(濊)와 구분하여 우리는 강원도 지역에 존재한 예(濊)를 동예(東濊)라고 부르며 이것을 맥국(춘천), 예국(강릉)으로 분리해 보기도 한다. 춘천지역에서는 번조선 지역의 요동식 동검이 2개나 나와 이 지역의 주민인 예맥족의 요동에서 한반도로의 이동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밖에 요하의 서쪽인 태자하 부근에 있던 양맥(梁貊), 서요하 상류에 있던 소수맥(小水貊 : 구려), 고구려인 대수맥이 있다.


9. 읍루(말갈)

읍루는 부여의 동북 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큰 바다를 임했고 남쪽은 북옥저에 접했으므로 이들은 흑룡강 유역의 만주 동북 연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에 따라 이들은 숙신(한), 읍루(위), 말갈(수), 여진(금), 만주(청) 등으로 불리웠으며 가장 추운 지방에 살았고 동이족(東夷族) 중에서 문화의 수준이 가장 낙후되었는데 <규원사화>에는 이들을 신지씨(神誌氏)의 후예로 보고 있다. 이들의 후예인 청(淸)나라가 중국의 마지막 왕조가 되었고 일제의 식민학자들이 만선 사관으로 이들을 우리의 역사와 분리시켰는데 이것은 만주의 영유권 때문이다. ☞(설명)

특히 이들은 발해사를 규명하는 중요한 요소로 중공, 일본, 현 사학계는 발해를 발갈족이 세운 나라이고 말갈족은 우리와 다른 이민족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읍루(말갈)은 고조선의 후예이며 진조선(眞朝鮮)이 멸망한 후에 등장하는 열국(列國) 중의 하나임을 명심해야 한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A.D. 668년이요, 발해의 건국을 A.D. 699년이라고 볼 때 고구려가 망한지 불과 31년 사이에 만주에서 고구려족은 사라지고 마치 말갈의 7부족이 만주 전체를 뒤덮은 것으로 오도(誤導)하고 있고 이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진국본기>에는 발해(大震國)의 건국을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으로 보고 있으며 그 건국자를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인 대중상(大仲象)으로 보고 있다. ☞(설명)


10. 삼한(三韓)

마한(馬韓)은 북으로 낙랑(낙랑국)에 접했고 남으로 왜(倭)와 접했으며,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어 북으로 예맥(濊貊)과 접했고, 변한(弁韓)은 진한의 남쪽에 있어 남으로 왜와 접했다. 마한은 54개국이요 진한은 12개국이고, 변한은 12개국인데 이 중 큰 나라는 만여 호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였다. 이들 모두는 옛날의 진국(辰國)이었으며 마한이 제일 커서 진왕(辰王)이 되어 월지국(月支國 : 익산)에 도읍해 삼한(三韓)을 다스렸다.

진조선이 망하기 전인 전삼한(前三韓)시기에는 만주지역에 있던 진한(辰韓)이 바로 진왕(辰王)이며 진한, 마한, 번한을 합한 진국(辰國)을 다스렸는데 진조선과 번조선이 망하여 막조선의 유민이 있던 한반도 남부로 이동해 온 후삼한(後三韓) 시기에서는 한반도가 마한의 땅이었으므로 마한이 바로 진왕이 되어 진국(진한, 마한, 변한의 전체)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마한은 B.C. 193년에 건국되어 무강왕, 안왕, 혜왕, 명왕, 효왕, 양왕, 원왕, 계왕, 왕학에 이르러 A.D. 9년에 백제에게 망하였다.


11. 백제, 신라, 가야

백제(百濟)는 고주몽의 적자(嫡子)인 유리(琉璃)가 고구려로 오자 소서노(召西奴)가 장차 자신의 아들들에게 이로움이 없다고 판단하여 비류(沸流)와 온조(溫祚) 두 아들과 함께 B.C. 32년에 고구려를 떠나 요동반도의 대수(帶水)와 패수(浿水) 사이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는데 B.C. 19년에 소서노가 죽고 비류(沸流)가 섰다. 이것이 바로 비류백제이다.

비류(沸流)가 즉위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동생인 온조(溫祚)는 마여, 오간 등의 무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B.C. 18년에 마한의 미추홀에 이르러 한산의 부아악(負兒岳)에 이르러 지형을 살핀 후 한수(漢水 : 한강)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였다.

그 후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들이 백제로 귀순해 왔는데 아마 A.D. 25년에 해성(海城) 부근의 남옥저인들이 백제로 투항해 온 것은 사실이 이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본다. 또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같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고 하여 비류백제가 한(요동)과 고구려 사이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는 A.D. 9년에 마한을 멸망시키고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신라(新羅)는 부여왕(동부여(가섭원부여)의 해부루)의 딸 파소가 남편 없이 애를 배어 의심을 받자 눈수(嫩水)로부터 도망하여 동옥저(東沃沮)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다로 진한(辰韓)의 나을촌에 이르러 박혁거세를 낳았다. 이에 소벌도리(고허촌장)가 데려가 키워 13세가 된 B.C. 57년에 진한 6부의 왕(거서간)으로 추대하여 서라벌에 도읍하고 사로라하였는데 진한은 만주에 있던 진조선의 유민이며 동부여 또한 진조선→북부여→동부여로 이어지는 진한의 왕통이기 때문에 박혁거세를 그들의 왕으로 세운 것이다.

가야(加羅)는 A.D. 42년에 김수로에 의해 금관(김해)에 건국되는 데 김수로를 흉노 휴도 왕의 후예로 보는 견해와 마한의 후예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마한의 후예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단서대강(檀書大綱)>에 A.D. 9년에 마한이 백제에 멸망당하자 그 왕인 영왕(寧王 : 學)이 동쪽이 낙동강가로 달아나 가야(加羅)라 칭하고 구비봉 밑에 거하며 가야왕이라고 하고 그 아들 이비가지로 세자를 삼았으며, A.D. 16년에 영왕이 9간(九干)을 쳐서 그들을 차지했으며 A.D. 17년에 가야의 영왕이 죽고 이비가지가 섰으나 A.D. 42년에 가양의 이비가지가 죽자 그의 둘째아들인 뇌실청예(惱室靑裔)가 9간의 추대를 받아 금관에 도읍을 정하고 가락(駕洛)이라하였으며 수로(首露)왕이라고 하였다. 이에 그의 형인 뇌실주일(惱室朱日)은 고령에 대가야를 세웠다.

 

【참고자료】


낙랑국(樂浪國)과 낙랑군(樂浪郡)의 차이


1.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역사적 배경

▣ 진개(秦開)와 연(燕)의 오군(五郡)

번조선(番朝鮮)은 B.C. 350년에 북막(北漠 : 중국측에서는 東胡)와 함께 연(燕)의 상곡(上谷)을 쳤다가, B.C. 343년에 연이 화친을 청해오므로 조양(造陽)을 경계로 삼았았다. 그러나 B.C. 341년에 연이 자객을 보내 번한인(番韓人) 해인(解仁)을 살해하고 B.C. 339년엔 안촌홀(安寸忽 : 安市城)을 돌파하여 험독(險瀆 : 번조선의 도읍)을 치자 수유인(須臾人) 기후(箕후)가 5천으로 진한, 번한의 군사와 함께 이를 격파하고 연의 도읍인 계성의 남쪽에 이르렀다. 이에 연이 화친을 청하고 대신과 자제를 인질로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연의 장수인 진개가 번조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된다.

그후 B.C. 323년에 연의 역왕(易王)이 왕이라 칭하는데 번조선에서는 수한(水韓)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기후가 이를 계승하여 번조선왕(番潮鮮王)이라 칭하고 번한성(番汗城)으로 천도를 한다.

B.C. 305년에 북호(동호)와 함께 번조선이 연의 상곡을 공격했고 연이 진개를 보내 B.C. 300년에 동호(북호)와 번조선을 쳐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장성을 쌓은 후에, 그 안쪽에 상곡(上谷),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의 5군을 설치하게 되는데 이러한 장성의 동쪽 끝을 만번한(滿番韓)이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번한이란 전에 번조선의 도읍지엿던 창여(昌黎)를 말한다. 왜냐하면 진시황이 B.C. 226년에 연을 치자 왕인 희(喜)가 요동으로 달아나다가 B.C. 222년에 멸망을 당한다. 이에 진시황은 B.C. 214년에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리장성을 축조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 조, 연의 장성을 연결한 것이다.

진시황이 B.C. 215년에 갈석산을, B.C. 209년에 2대 황제인 호해가 요동에 와서 그 아비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갈석산은 즉 요동에 있었다.

<한서> 지리지에는 요동왕 한광의 도읍이 무종(無終)이었으며, 후한서 원소열전엔 "양평(襄平)은 현인데 요동군에 속하며 그 옛성이 지금의 평주 노룡현(盧龍縣)의 서남에 있다"고 하였으며, 진서 당빈전엔 "진장성(秦長城)의 요새를 다시 쌓았는데 온성으로부터 갈석에 닿았다"고 했고, 통전(通典)엔 "갈석산은 한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이 산에서부터 장성이 시작된다."고 했으며, 진서(晋書)에 "수성현은 진의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고하여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갈석산임을 말해 주고 있다.


▣ 위만(衛滿)과 번조선(番朝鮮)의 멸망

한(漢)의 고조(유방)는 B.C. 202년에 항우를 멸한 후 연왕인 장다를 없애고 노관(盧관)으로 연왕에 봉하였는데 그가 죽자 노관은 B.C. 195년에 흉노(匈奴)로 달아났다. 이때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은 번조선으로 망명하였는데 번조선 왕 기준(箕準)이 그로 하여금 중국과의 변방인 상하운장(上下雲障)을 지키게 하였다. 이 당시 이곳에는 중국의 난리를 피해 망명해 온 연, 제, 조의 무리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위만은 이들을 이끌고 B.C. 194년에 번조선을 쳐서 멸망시킨다. 상하운장의 서쪽 경계에는 진나라 당시 변방 초소인 요동외요가 있었는데 한이 건국된 후에는 멀어 지킬 수가 없어서 연과 진이 쌓았던 옛 요새인 요동고새 (遼東故塞)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요동고새란 산해관(山海關)이다.

위만은 새(塞)⇒패수(浿水)⇒상하운장(上下雲障)⇒왕검성(王儉城)으로 이동해 갔는데 새와 패수 사이는 말을 달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여기서 패수란 한나라 당시 패수인 난하가 아니라 요동외요가 있던 진나라 당시의 패수 중전소동사하(中前所東沙河)로 상하운장은 100리였으며 이곳과 육율하 사이였고 지금도 그 사이엔 황지(荒地) 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진(秦)과 번조선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한사군(漢四郡)의 허실

1) 한과 위만조선

사기(史記) 조선전에 보면 한무제는 양복으로 해군을 이끌고 제(齊 : 산동반도)로부터 발해를 건너고 순체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요동)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이 당시 발해(渤海)란 현재와 같이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를 말하며 요동은 난하와 만리장성 사이로 산해관에서 출발했고 위만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발해의 북쪽과 만리장성과 요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 이며, 왕검성은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에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하였다.

2) 전쟁의 결과

전쟁의 결과에 대하여 사마천은 <사기>에서 "우거는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것만 믿다가 나라의 대가 끊어지게 하였고, 섭하는 공을 도둑질했다가 적의 군사에게 머리를 잃었으며 누선(樓船 : 양복)은 장졸이 적은 것을 가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 제 허물을 벗어나려 했다. 그리하여 번우를 잃고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손수와 더불어 전공을 다투다가 둘 다 함께 죽임을 당해서 양쪽(한과 위만)의 군사 모두 욕되었으며 장수로서 후(侯)에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섭하 : 전사 ㉡위산 : 사형 ㉢공손수 : 사형 ㉣순체 : 사형 ㉤양복 : 서인(庶人)이 됨

전쟁의 결과를 보면 한(漢)도 우거(위만의 손자)도 모두 패한 전쟁인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자는 누구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북부여기 상편> 4대 단군 고우루 13년조에 "한의 유철(무제)나 평나를 쳐들어와 우거를 멸하고 사군을 두고자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동명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의 침략군을 연파하자 그 지방의 유민들이 사방에서 응하여 도우므로 군보가 크게 떨쳤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자 동명(東明) 고두막이 군사를 일으켜 유민(번조선의 백성)을 이끌고 한의 세력을 격파한 것이다.

한편 <한서(漢書)>에는 이 전쟁에서 한나라로 투항한 자들이 후(侯)에 봉해졌는데 그 지역과 이름은 다음과 같다.

㉠ 획청후 삼(획淸侯 參) : 제 (齊:산동지역)에 봉해졌고 천한 2년(B.C. 99)에 조선의 망노(亡虜)를 감춰 주어 옥에 갇혀 병사함.
㉡ 평주후 협(平州侯 협) : 양부(梁父)에 봉해졌고 원봉 4년(B.C. 107)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온양후 최(溫陽侯 最) : 남양에 봉해졌고 태초 3년(B.C. 102)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추저후 음(萩저侯 陰) : 발해(渤海)에 봉해졌고 정화 2년(B.C. 91)에 죽은 후, 후사가 없어서 없앰
㉤ 기후 장(幾侯 長) : 하동(河東)에 봉해졌고 원봉 6년(B.C. 105)에 조선(朝鮮)과 모반하므로 죽임

이들 5명은 연과 제나라의 땅에 봉해졌는데 3명은 수명이 다해 죽었고 2명은 조선과 내통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만일 위만조선이 멸망당한 후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면 여기에 나타난 조선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은 한의 세력을 격파하면서 고두막이 요하의 동쪽지역에 세운 졸본부여(卒本夫餘)인 것이다.

즉,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 "위략에 이르기를 우거가 멸망하기 전에 조선상 역계영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그 말을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가니 그를 따른 자가 2천여 호나 되었다."고한 진국(辰國)은 위만조선의 동쪽인 요하 동족에 있던 북부여를 말한 것이다.

진국(辰國)이란 삼조선(진, 번, 막조선)의 통칭으로, 그 중심세력인 진조선을 이어받은 북부여 또는 진국으로 표기된 것이다.

3) 한사군의 진상

현 강단 사학계에서 한사군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으로 되어 있고 이들 대부분을 한반도 중북부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사기> 조선전에는 이러한 4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120년 후에 저작된 후한서에서야 그 이름이 나오고 있는데 만일 4군이 설치되었다면 그 당시(한무제)의 인물인 사마천이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구나 <한서지리지>에는 진번과 임둔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고, 가연전(賈捐傳)에는 "무제가 갈석(碣石)을 지나 낙랑과 현도로써 군을 삼았다"고 하여 진번과 임둔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번과 임둔은 위만이 번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의 요동 태수에게서 재물과 병사를 얻어 그 옆에 있던 진번과 임둔의 두 고을을 쳤다고 한 기록만이 남아 있다.

<한서지리지>에, B.C. 108년에 3군(낙랑, 진번, 임둔)을 설치하고 B.C. 107년에 현도를 설치하였다고 하였고 B.C. 86년에는 낙랑을 남부도위 (7현)와 동부도위 (7현)로 나누었다고 하였다.

또 B.C. 81년엔 진번을 폐하여 낙랑에 포함시키고 임둔을 폐하여 현도에 포함시켰다고 무능서에 나오는데 이 책의 저자인 사마여상(司馬如相)은 한무제가 조선을 친 것보다 10년 전인 원봉 6년 (B.C. 117) 에 죽은 자로 그가 10년 후에 일어날 사실을 말했다는 것도 위증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조선상고사>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자 고두막이 이들을 격파하면서 요하를 건너 졸본지역으로 이동해 졸본부여를 세웠으며 한의 세력은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다가 다시 요하의 서쪽까지 팽창하였는데 이 당시 진번과 임둔은 일시적으로 설치되었거나, 아예 설치되지 않았던 것을 조작한 것일 수도 있어 실제 확실한 것은 낙랑군과 현도군이며 그 설치 연대 또한 매우 혼돈되어 있다.


2. 한사군(漢四郡)에 대한 일제하의 역사조작 과정

1) 1887년 일제(日帝)는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함.

2) 1889년 사학과 주임으로 실증사학(實證史學)의 거두인 랑케(Ranke)의 제자 독일인 리스(Riess)를 초빙하여 사학회(史學會 : 회원 40명)를 조직하고 사회학 잡지 (1892년에는 사학잡지로 개칭)를 발간하였다. 이 당시 요시다(吉田東伍), 하야시(林泰輔), 스가(管政友), 나까(那珂通世), 시라또리(白烏庫吉), 쓰보이(坪井九馬三), 시데하라(幣原坦) 등이 한국관계의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3) 1907년 만주철도주식회사가 일본 정부의 명령에 의해 '만주역사지리조사실'을 만들어 동경제대 교수인 시라또리와 쓰다(津田左右吉), 센나이(箭內亘), 마쓰이(松井等), 이바나(稻葉岩吉), 이께우지(池內宏) 등을 참여시켜 <만주지리역사연구>,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 등을 간행하였는데 이들은 한국의 주체적인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용시킴으로써 한국사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만선사(滿鮮史)를 주장하였다.

4) 1909년 동경제대 교수인 도리이(烏居龍藏)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 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해 남만주(南滿洲)에 파견하여 그는 <남만주 조사보고>를 제출하였다.
한편 조선통감부가 조선의 고적조사를 동경공대 교수인 세키노(關野貞)에게 의뢰해 '고구려([高句麗) 고적조사반'을 조직하여 평양(平壤)지역의 고분 2기를 발굴하였다.

5)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이미 '한대 낙랑유적 학술조사'를 완료한 도리이(烏居龍藏)의 제언에 의해 총독부는 '고구려 고적조사사업'을 '한대낙랑군 유적조사사업'으로 개칭하여 실시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평양지역의 유물을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유물로 조작하기 위한 전초작업이다. 이들은 평양지역 고분을 2차로 발굴해 벽돌로 쌓여진 현실(玄室)내에서 한대의 양식인 동경과 칼, 창, 도기 등을 얻었다.

6) 1911년 10월 세끼노(關野貞)가 황해도 사리원역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전'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이 이것을 근거로 황해도 지역을 대방군(帶方郡)이라고 조작하고 있다.

7) 1912년 4월 9일 세끼노 등이 사리원역 부근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8) 1913년 9월 23일에 대동강변의 고분분포 지역의 중앙인 강언덕의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음을 알고 실제 그곳에 있는 토성(土城)을 답사해 기와 파편을 채집하였는데 이 토성을 그들은 한(漢)의 낙랑군의 치소(治所)로 조작하였다. 또 9월 30일에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今西龍)가 5회 고적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龍岡)에서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서 용강이 점제현(낙랑군 소속)으로 조작되었다.

9) 1915년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에서 '편찬과'를 설치해 조선반도사의 편찬에 착수하여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였고 12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10) 19196년 7월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11) 1919년 2월 조선총독부가 <조선금석총람>을 발간하였다.

12) 1920년 야마다(山田孝雄)에 의해 봉니(封泥)에 대한 가치가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13) 1921년 가을 세노끼는 야마다가 수집한 '낙랑태수장'의 봉니가 출토되었다는 지역을 정밀조사 하였으나 단 한 점도 얻지 못했다.

14) 1922년 10월 30일 '낙랑태수장'의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50원이라는 고가로 사들임. 이 해 12월 조선총독부 훈령 제 64호에 의해 {조선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위원에는 어윤적(魚允迪), 이능화(李能和), 정만조(鄭萬朝), 유맹(劉猛), 이마니시(今西龍), 이나바(稻葉岩吉),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등이었다.

15) 1923년 '조선우위'라는 봉니가 토성리 부근 촌부의 손으로부터 평양 이심법원 검사장인 세끼구찌(關口半)의 손에 들어감.

16) 1925년 5월 경성제국대학 예과가 설치되었고 6월 6일에 일제 천황(天皇)의 칙령 제28호에 의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독립관청으로 설치되었는데 고문에 이완용, 박영효, 권중현, 구로이따(黑板勝美), 핫또리(服部宇之吉), 나이또(內藤虎次郞), 야마다(山田三良), 이윤용, 위원에 최남선, 이능화, 어윤적, 윤필구, 현채(玄采), 홍희(洪熹), 유맹, 이진호, 이마니시(今西龍), 도리이(烏居龍藏), 마쓰이(松井等), 가시하라(栢原昌三), 오따니(大谷勝眞), 후지다(藤田亮策), 간사에 김동준, 정교원, 손영목, 엄창섭, 이대우, 이동진, 신필구, 이병욱, 수사관에 이나바(稻葉岩吉), 후지다(藤田亮策), 나까무라(中村榮孝), 스에마쓰(末松保和), 홍의, 신석호, 수사관보에 이병도(李丙燾) 등이다. 이들은 정무총감을 회장으로 하고 위원회에서 편찬의 방침을 결정하고 수사관, 수사관보 등이 실제 편찬업무를 담당하였다.

17) 1926년 4월에 경성제국대학에 법문학부가 개설되었으며 5월엔 옛날 대마도(對馬島) 도주인 무네(宗)백작 집안에 소장되어 내려온 조선관계 사료 전부를 몰수하였다. 이 당시 평양경찰서 경부보 우시무라(牛村三郞)와 상공회사 기사인 모리오가(諸岡榮治) 등이 완전한 봉니와 파편 및 단편을 여러 개 입수함.

18) 1930년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이었던 나까무라(中村榮孝)가 주동이 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와 조선사편수회 요인들로 구성되어 한국인으로서 최남선, 이능화, 이병도, 신석호 등이 있으며 이 회는 <청구학총>을 발간하였다.

19) 1931년 12월 '낙랑태수장('樂浪太守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사들였고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朝鮮史)>의 일부가 인쇄에 들어갔다.

20) 1934년 2월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이라는 봉니를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100원에 구입함.

21) 1937년 <조선사([朝鮮史)>가 35책으로 완성되었는데 16년간 100만원이라는 거액이 투자된 것으로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모든 자료를 망라하여 서술한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많은 취사선택이 행하여져 그들에게 유리하고 필요한 것을 되도록 많이 수록하고 한국사의 본질적인 문제나 민족문제 그리고 그들에게 불리한 것은 수록하지 않았다.

AND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31)
공지사항 (2)
JAVA (1)
ORACLE (12)
기타 (15)
JSP (1)
flash (7)
자존심의이유 (36)
secret (0)
좋은글 모음 (34)
UNIX (2)
민가 (21)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CALENDAR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

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