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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후예이길 거부하는자 .. 꺼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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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기전 상편(三聖記全 上篇)

- 안함로(安含老) 지음 -

  吾桓建國最古有一神在斯白力之天爲獨化之神光明照宇宙權化生萬物

  우리 한(桓)1)의 건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랜 옛날이었는데 일신(一神)이 있어 사백력(斯白力)2)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3)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 큰 교화4)는 만물을 낳았다.


  長生久視恒得決樂乘遊至氣妙契自然無形而見無爲而作無言而行

  오래오래 살면서<長生久視> 늘 쾌락을 즐겼으니<恒得快樂> 지극한 기를 타고 노닐고 <乘遊至氣> 그 묘함은 저절로 기꺼웠다.<妙契自然> 모습 없이 볼 수 있고<無形而見> 행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無爲而作> 말없으면서 다 행하였다.<無言而行>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於是桓因亦以監羣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어느 날인가5) 동녀동남(童女童男) 800이 흑수(黑水)6) 백산(白山)7)의 땅에 내려왔는데 이에 한인(桓因)은 또한 감군(監羣)8)으로서 천계(天界)에 계시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켜서 날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처음으로 가르치셨다. 이를 한국(桓國)9)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천제 한인씨(天帝 桓因氏) 또는 안파견(安巴堅)10)이라 하며, 7세를 전했는데 그 연대는 알 수가 없다.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持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

  뒤에 한웅씨(桓雄氏)가 계속하여 일어나 천신(天神)의 뜻을 받들어 백산(白山)과 흑수(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子井女井>11)에 천평(天坪)12)을 마련하고 청구(靑邱)13)에 정지(井地)를 정했다. 천부인(天符印)14)을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五事>15)을 주관하시며 세상에 계시면서 교화를 베푸시니<在世理化> 인간을 크게 유익하게 하였다<弘益人間>.


  立都神市國稱培達擇三七日祭天神忌愼外物閉門自修呪願有功服藥成仙劃卦知來執象運神命羣靈諸哲爲輔納熊氏女爲后定婚嫁之禮以獸皮爲幣耕種有畜置市交易九域貢賦鳥獸率舞後人奉之爲地上最高之神世祀不絶神市之季有治尤天王恢拓靑邱傳十八世歷一千五百六十五年

  또 신시(神市)에 도읍을 세우시고 나라를 배달(倍達)16)이라 칭했다. 삼칠일<21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지내고 밖의 물건을 꺼리고 근신하며,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약을 드시고 신선이 되시니, 괘(卦)를 그어 올 것을 알며 상(象)을 잡아 신명(神命)을 움직였다. 또 군령(羣靈)과 제철(諸哲)들이 보필하도록 하시고 웅씨의 여인<熊氏女>17)을 거두어 후(后)로 삼으시고 혼인의 예법을 정해 짐승 가죽으로써 폐물을 삼았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을 열어 교환하도록 하니, 온 세상이 조공을 바치며 새와 짐승도 덩달아 춤추었다. 뒷날 사람들은 그를 지상 최고의 신이라고 받들어 세세토록 제사가 끊임이 없었다.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治尤天王)18)이 청구(靑丘)를 개척하여 넓혔으며,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누렸다.


  後神人王儉降到于不咸之山檀木之墟其至神之德兼聖之仁乃能承詔繼天而建極巍蕩惟烈九桓之民咸悅誠服推爲天帝化神而帝之是爲檀君王儉復神市舊規設19)都阿斯達開國20)號朝鮮

  뒤에 신인 왕검(神人 王儉)께서 불함산(不咸山)21)의 박달나무터에 내려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하여 갖추었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으니 나라를 세운 뜻과 법<建極>은 높고 넓고 강하고 열렬하였다. 이에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그를 제왕으로 모셨다. 그가 곧 단군(檀君)22)왕검으로 신시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舊規>24)을 되찾고 서울을 아사달(阿斯達)25)에 설치하여 국호(國號)를 조선(朝鮮)26)으로 하여 나라를 열었다.


  檀君端拱無爲坐定世界玄妙得道接化羣生命彭虞闢土地成造起宮室高矢主種稼臣智造書契奇省設醫藥那乙管版籍羲典卦筮尤作兵馬納菲西岬河伯女爲后治蠶淳厖之治熙洽四表

  단군은 하염없이 맨손으로 고요히 앉아서도 세상을 평정하고, 깊고 묘한 도27)를 얻어 여러 생명들을 두루 교화하였다.<接化羣生命>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는 농사를 장려하도록 맡기셨고, 신지(臣智)28)에게 명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을 베풀게 하고,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卦莁>을 관장케 하고, 우(尤)에겐 병마(兵馬)를 관장하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29)의 하백녀(河伯女)를 거두어 후(后)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순방의 다스림<淳厖之治>이 온 세상에 두루 미쳐 태평치세를 이루었다.


  丙辰周考時改國號爲大夫餘自白岳又徙於藏唐京仍設八條讀書習射爲課祭天爲敎田蠶是務山澤無禁罪不及孥與民共議協力成治男有常職女有好逑家皆蓄積山無盜賊野不見飢絃歌溢域檀君王儉自戊辰統國傳四十七世歷二千九十六年

  병진년(B.C.425, 44세 구물 단군 원년), 주나라 고(考)임금(B.C.440~425)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30)라 바꾸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에 팔조를 법으로 하고,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일과로 하며, 하늘에 제사 지냄을 종교로 하고, 누에 기르기에 힘쓰도록 하였다. 어딜 가나 금지하는 바가 없었고, 죄를 처자에게까지 미치지 않게 하며, 백성과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나라를 다스렸다. 사내에게는 언제나 직업이 있었고, 여자에게는 좋은 짝이 있었으며, 집집마다 재물이 쌓였다. 산엔 도적이 없고, 들엔 굶주린 자가 없으며, 거문고 노랫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였다.

  단군왕검은 무진년(B.C.2333)부터 나라를 다스려서 47세를 전하여 2,096년을 누렸다.


  壬戌秦始時神人大解慕漱起於熊心山

  임술년(B.C.239), 진시황((秦始皇)(B.C.246~209)때 신인(神人)이신 대해모수(大解慕漱)께서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났다.


  丁未漢惠時燕酋衛滿竊居西鄙一隅番韓準爲戰不敵入海而亡自此三韓所率之衆殆遷民於漢水之南一時群雄競兵於遼海之東至癸酉漢武時漢移兵滅右渠西鴨綠人高豆莫汗倡義興兵赤稱檀君

  정미년(B.C.194) 한나라 혜제(惠帝)(B.C.195~188)때 연나라 추장이었던 위만(衛滿)이 은근히 서쪽 변두리 땅의 한 구석에 스며들었는데 번한(番韓)31)의 준(準 : 箕準)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길 수 없자 바닷길을 택해 멀리 망명했다. 이로부터 삼한(三韓)32)의 무리는 거의 한수(漢水)33)의 남쪽으로 옮겨갔으나 한때에는 여러 영웅들이 요해(遼海)의 동쪽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계유년(B.C.108) 한나라의 무제(武帝) (B.C.141~87)때 한나라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右渠)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역시 단군(檀君)이라 칭했다.


  乙未漢昭時進據夫餘故都稱國東明是乃新羅故壤也

  을미년(B.C.86) 한나라 소제(昭帝)(B.C.87~74)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34)이라고 나라 이름을 부르니 이것이 곧 신라(新羅)의 옛 땅35)이다.

  至癸亥春正月高鄒牟亦以天帝之子繼北夫餘而興復檀君舊章詞解慕漱爲太祖始建元爲多勿是爲高句麗始組也

  계해년(B.C.58)에 이르러 봄철 정월에 역시 천제의 아들인 고추모(高雛牟)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났다. 단군의 옛 법을 되찾고 해모수를 제사하여 태조로 삼고 처음으로 연호를 정하여 다물(多勿)36)이라 하니 바로 고구려(高句麗)37)의 시조이다.


1) ‘ 한(桓)’은 나라 이름이기 이전에 ‘태양’을 가리켰다. 이 문장의 주어로서 태양으로 상징되는 사람 또는 태양의 후예로 자처하는 종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이 문장의 해석이 전혀 달라진다. 즉 “吾桓建國最古”는 “우리 태양으로 상징되는 사람 또는 태양족의 후예가 나라를 세웠는데 가장 오랜 옛날이었다” 환(桓)은 ‘밝은 빛’ ‘해님’ ‘하느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출처 : 한배달>

   한(韓)은 한반도 또는 한반도 토착민(土着民)을 뜻하는 용어이다. 한반도 토착민인 한(韓) 은 B.C. 194년 이전에는 한반도 전 지역에 흩어져 살았으나, B.C. 194년 이후에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 살은 한(韓) 무리들은 만주에서 이주한 동옥저(東沃沮)와 동예(東濊) 무리들에게 밀려 남쪽으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살은 한(韓) 무리들은 일시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遺民)들에게 패하였으나, 곧 반격을 가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 유민들을 한수(漢水) 이남으로 쫓아 버리고 그 곳에 나라(樂浪)를 세웠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 사백력(斯白力) : 시베리아로 비정, 중국에서는 시베리아를 서백리아(西白利亞)로 표기하고 있다.

3) 홀로 변 화한 신 : 獨化之神이라고 했는데 홀로 변화하여 신이 되었다는 뜻. 건곤(乾坤) 음양(陰陽) 곧 남녀의 배합 없이 저절로 변하여 이루어진 신인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독화지삼신(獨化之三神)이라 하여 국상입존(國常立尊)․국협추(퇴)존(國狹槌尊)․풍짐(침)순존(豊斟淳尊)의 삼신(三神)을 뜻한다고 되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인 만큼 저들의 역사가 우리와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4) 큰 교화 : 권화(權化)라고 했으니 불교에서는 보살이 중행을 제도코저 임시로 몸을 바꾸어 이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 또는 그 화신(化身)을 말한다. <삼성기 전>에 이런 불교의 용어가 쓰이는 것은 그것이 쓰여진 사회의 배경을 말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5) ‘일(日)’을 ‘어느 날인가’로 해석하였는데, 여기서도 ‘일(日)’은 태양 또는 태양으로 상징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면 본문의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즉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는 “태양으로 상징되는 분께서 어린아이 800명을 ‘검물(黑水 : 신의 강)과 ’흰 산(白山 : 흰 산)의 땅으로 내려보냈다.”로 해석될 수도 있다.

6) 흑수(黑水) : 만주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흑룡강(黑龍江) 혹은 바이칼 호수로 비정한다. 만주어의 살합연오라(薩合連烏拉), 러시아말로는 아무르, 강의 근원지는 둘인데 하나는 중국의 국경, 즉 외몽고 고객이객계(古喀爾喀界) 안의 긍특산(肯特山) 동쪽 기슭에 흐르는 오수하(敖嫂河)라 하는데 바로 원사(元史)의 주난하로 징기스칸이 일어난 땅이라 한다. 또 하나는 러시아령의 탁공토산(倬功土山)의 북쪽 인(因弋達河)라 한다. 1912년 청나라와 일본이 체결한 <간도에 관한 폅약>에 의해서 한만국경선이 압록강↔두만강으로 정해진 것이며, 저 1712년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의 기록 <공위토문서위압록>에 따르면 우리의 북쪽 국경선은 압록강 →토문강→송화강→흑룡강(아무르강)으로 확대된다. 이렇게 흑룡강 즉 흑수는 우리 역사의 출발에서부터 우리의 강역임을 알게 한다. 과연 1965년 일본정부는 <간도협약>을 무효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국경은 다시 옛날로 되돌아간 셈이다. 한편 카톨릭의 바티칸 교황청에서 작성한 지도(1912년)에 보면 우리의 북방 국경선이 위에서 기록한 것처럼 압록강→토문강→송화강→아무르강으로 그려져 있고, 두만강 북쪽의 간도성 흑룡강성 및 길림성은 천주교 한국교구의 원사교구로 명시되어 있다. ※ 한국정사학회에 보관중인 파리(PARIS)에서 발행한 <르 까또리시즘 엔 꼬레(Le Catbolicisme En Coree>에 실린 우리 나라 지도 참고바람. <임승국>

7) 백산(白山) : 중앙아시아 일대의 천산산맥과 알타이산맥이라는 설과 백두산이라는 설이 있다. 임승국씨는 백두산으로 비정하는데 임승국씨는 <한단고기>에서 “백두산은 유사 이래로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또 최근 일부에서는 이 백산을 중국 감숙성의 태백산이라고 하는 학설을 퍼뜨리는 이도 있으나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백두산을 빼고 중국의 태백산이 백산이라고 함에는 보다 확실하고 확고한 근거가 필요한 것이다. 중국 <이십오사>에 보이는 ‘백산’이나 ‘태백’이 의심없이 지금의 백두산임을 밝혀둔다.”고 말했다.

8) 감군(監羣) : 중생을 보살피고 감독하는 임무를 띤 직책. 넓은 의미에서의 스승의 역할

9) 환국(桓國) : 문구상으로는 환한 하늘에 있는 나라 즉 하늘나라라는 뜻이나, 실제로는 고대에 구려(九黎) 무리들이 바이칼호 동쪽에 세운 나라의 명칭이다. 고기(古記)에 천해(天海 : 바이칼호)의 동쪽 땅(고대에 구려 무리들이 흑룡강과 백두산 사이로 남하하기 전에 거주한 곳)도 환국(桓國)으로 적혀 있고, 그곳의 임금도 환인(桓因)으로 적혀 있는 것은, 고대의 구려 무리들이 해가 뜨거나 지는 곳도 하늘나라의 일부로 보고, 하늘나라 임금(桓因)이 밤에는 천해의 동쪽 땅에서 쉬다가 아침이 되면 하늘나라로 올라가서 정사를 돌본다고 믿은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일부 사람들은 환국(桓國)을 "한국"으로, 환인(桓因)을 "한인"으로, 환웅(桓雄)을 "한웅"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한단고기"로 읽고 있다. 어떤 사람은 "桓國", "桓因", "桓雄"을 "환국", "환인", "환웅"이라 읽는 것은, 해(태양)를 국기의 문양으로 사용하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이 고대에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주체세력이었던 것처럼 주장하기 위하여 그렇게 읽는 것이므로, 우리민족은 "桓"을 "환"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한(韓) 민족을 뜻하는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주체세력은 한(韓) 민족이지 일본 민족이 아니라는 취지로 그런 주장을 하였다. 일본인들이 국기의 문양으로 해(태양)을 사용한 것은 고대에 해와 달을 숭배한 구려(부여) 무리들 중 일부가 만주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인데, 그런 이유 때문에 "桓"을 "환"으로 발음하지 않고 "한"으로 발음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 어떤 사람은 "桓因"은 "하느님"이라는 고대 우리말을 음을 따라 한자로 적은 것이고, "桓"은 "하늘"이 뒤에 "하느"로 변했다가 다시 "한"으로 변한 것이므로, 하늘을 뜻하는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분은 대종교의 신리대전 주해에 "桓"을 "한"으로 읽으라는 주해가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내세운다. 고기(古記)의 용어는 우리민족의 고대신앙(古代信仰)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고대 우리민족은 온 세상의 만물을 자라게 하는 환한 빛이 나오는 근원을 해님으로 보고, 광명(光明)을 숭상하여 해님을 하늘나라 임금으로 받들고 해님을 환인(桓因.桓仁)이라 불렀다. 즉 고기(古記)에 나오는 "桓"은 "하늘"이라는 뜻이 아니고 하느님(해님:天帝)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因)은 "님"이라는 뜻이 아니고 밝음의 근본이라는 뜻이며, 인(仁)은 환님(하느님)이 어짐으로 세상을 다스렸다는 뜻이다. <환단고기> 삼성기에는 "우리 환국(桓國)의 건국은 오랜 옛날이었는데, 한 신(神)이 있어 시베리아의 하늘에서 홀로 변화한 신(神)이 되시니 밝은 빛은 온 우주를 비추고..후략"라고 적혀 있는데, 위 문구에서 보듯이 "환(桓)"은 밝은 빛 즉 해님을 가리킨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0) 안파견(安巴堅) : 하늘을 계승하여 아버지가 되었다는 뜻의 이름. 아버지를 한문으로 표기한 말.

   <임승국의 주> : 중국 발음으로는 ‘안파첸’인 바, 모름지기 우리말의 아버지에 해당하는 발음일 것이다. 요(遼)의 시조를 ‘아보기’라 하는데 만주 말의 발음으로는 어김 없이 아버지가 된다. 요를 고구려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라고 하거니와 국왕을 아버지라고 발음하는 저들의 말을 통해 그것을 짐작케 한다. 안파견 역시 그런 각도로 해석함이 좋을 것 같다.

11) 사람 모이는 곳<子井女井> : 우물이나 밭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이므로 이르는 말.

12) 천평(天坪) : 백두산 정상의 연못을 천지라 하니 백두산 정상의 어떤 땅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일설에는 백두산 서쪽 산기슭에 500리 벌판이 있는데 이곳을 북계룡이라 하며 앞날의 도읍지라 하니 혹 이곳을 이름인가? <임승국의 주>

13) 청구(靑邱) : 산동반도의 동래지방으로 비 정한다. 과거 이 청구를 막연히 한반도라 생각해 왔으나 크게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저 상고사의 대상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동양의 온갖 고전이 말하는 동이(東夷) 조선(朝鮮) 청구(靑邱)는 한반도가 아니라 중원대륙 안에 있는 동이 조선 청구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십오사>를 적은 사마천을 비롯한 모든 사가들이 황해 바다 건너에 한반도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지리 지식이 유치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황제가 동쪽으로 청구에 이르러 풍산을 지나 자부진인을 만났다.(黃帝동도청구 과풍산 견자부진인」

14) 천부인(天符印) : 거울, 북(방울), 칼이라는 설과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15) 다섯 가지 일<五事> : 穀․命․病․刑․善惡

16) 배달국(白達國→倍達國 : 일명 檀國 또는 神市) : 고대에 18명의 환웅(桓雄)이 다스린 시대를 말한다. 고기에는 배달국(培達國)이 일명 단국(檀國) 또는 신시(神市)로도 적혀 있다. 이 신시(神市)는 시조환웅(始祖桓雄)이 세운 배달국(培達國)의 초기 도읍지(都邑地) 이름 또는 배달국(培達國)의 다른 이름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17) 웅씨의 여인(熊氏女 : 熊女) : 지신족의 여인.

18) 치우천왕(治尤天王) : 14세 자오지 한웅, 원래는 蚩尤로 적는다.

19) 설(設) : <단군세기>에는 ‘립(立)’으로 기록되어 있다.

20) 개국(開國) : <단군세기>에는 ‘건국(建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21) 불함산(不咸山) : 하르빈 남쪽 完達山으로 비정

23) 환족(桓族) : 환한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뜻.

22) 단군(檀君) : "단(檀)"은 "밝달"이라는 고대말을 뒤에 한자로 적은 것으로, "밝"은 밝은 빛을 내는 해님과 달님 즉 천제(天帝)를 뜻하고, "달"은 땅을 뜻하는 고대말이다. 즉 "밝달"은 밝은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온 무리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군(君)"은 아들을 뜻하는 한자이다. 따라서 단군(檀君)은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온 천제(天帝)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고대 우리민족은 하늘나라 임금인 환인이 아들 환웅과 무리 3천명을 지상세계로 내려보냄으로써 우리민족의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왕(王)이 된 것을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단군(檀君)은 천제(天帝)와의 관계는 아들(君)이나, 지상의 백성들과의 관계는 임금(帝)이므로, 고기에는 단군(檀君)이 단제(檀帝)로도 적혀 있다. 고기(古記)에는 단(檀) 대신에 배달(白達, 倍達)로도 적혀 있는데, 배(白)는 밝은 빛을 내는 해님과 달님을 뜻하고, 달(達)은 땅이라는 뜻의 고대말이므로, 단(檀)과 배달(白達)은 같은 뜻이다. 고대에는 해와 달을 뜻하는 "밝"을 "발" 또는 "박"으로 발음하였는데, 이를 발음대로 한자로 "發" "渤" "勃" "博" "薄" 등으로 적었다. 중국의 사서에 나오는 "發" "渤" "勃" "博" "薄" 지역은 환족(桓族)23)이 살았던 지역이다. 고대에는 발(渤) 무리가 배달국의 치우천황 이후부터 중국의 북부와 동부 지방에도 진출하여 살고 있었던데, 발해(渤海)는 발 무리가 사는 곳에 있는 바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라 이름 발해는 고대말 "발(밝다는 뜻의 태양)"과 "해(태양)"가 모두 해님(太陽)을 뜻하므로, 발해는 해님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辰國)라는 뜻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4) 구규(舊規) : 옛 법규, 즉 신시시대의 법규를 말한다.

25) 아사달(阿斯達) : 아사=(처음의, 새로운) + 달(땅)

   고대말 "아사"는 새로운 또는 처음이라는 뜻이고, "달"은 땅이라는 뜻이다. 즉 아사달은 새(新) 땅이라는 뜻으로 사로벌, 신라(新羅)와 같은 뜻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6) 조선(朝鮮) : 중국인들은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땅을 조선(朝鮮)이라 불렀는데, "朝"는 해가 뜨는 동쪽을 뜻하고, "鮮"은 발해연안의 어업족을 가리키는 어(魚)와, 그 북쪽의 유목족을 가리키는 양(羊)을 합성하여 만든 글자이다. 중국인들이 초기에 "朝鮮"이라 부른 지역은 해가 뜨는 곳에 있는 중국의 동쪽 즉 발해연안과 그 북쪽 유목 지역이다. 후에 중국의 영역이 동진(東進) 함에 따라 조선이라 부른 지역의 위치도 점차 동진(東進) 하여 나중에는 한반도까지 조선이라 불렀다. 따라서 중국의 사서에 조선이 부른 지역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조선이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부른 때는 B.C. 2333년에 왕검이 배달국 지역의 구려 무리들을 통합하여 세운 왕검조선(王儉朝鮮), .B.C. 324년에 왕검조선의 번한(番汗) 지역에 살은 수유족의 우두머리 기후가 왕검조선의 번한 지역을 장악하여 세운 기자조선(箕子朝鮮), B.C. 194년에 위만이 기자조선을 빼앗아 세운 위만조선(衛滿朝鮮), 그리고 이성계가 세운 이씨조선이다. 본서에서 조선 앞에 나라를 세운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것은 다른 조선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본래의 나라 이름은 모두 조선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27) 깊고 묘한 도(玄妙得道) : 儒․佛․仙 三敎를 다 포함하는 우리 나라 고유의 도, 즉 신선도를 말한다.

28) 신지(臣智) : 神誌의 誤字인 것으로 추정.

29) 비서갑(菲西岬) : 하르빈으로 비정

30) 불여(不黎) 일명 부여(夫餘) : 고대의 구려 무리들은 자신들을 자칭 천제(天帝)가 있는 하늘나라에서 지상세계로 내려온 무리라고 칭하였는데, 이 말을 뒤에 한자로 적으면서 천제는 "불(不)"로, 무리는 "여(黎)"로 적어 불여(不黎)로 적었다. 이 불여를 뒤에 부여로 읽고 음을 따라 "夫餘"로 적었다. 산해경에는 부여가 불여(不與)로 적혀 있는데,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무리라는 것을 한자로 적음에 있어 불(不)자 대신에 환(桓), 고(高), 고(古), 백(白), 화(火), 화(華), 명(明), 일(日), 위(尉. 慰), 위(魏), 불(弗) 등으로 적었고, 여(黎. 與)자 대신에 이(離.伊), 여(麗.余), 로(虜) 등으로도 적었다. 위와 같이 부여(夫餘)는 특정한 부족 명칭이 아니고 구려(九黎) 지역에 거주하면서 해님과 달님을 숭배한 무리들을 총칭하여 부른 명칭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살던 특정한 무리만 부여(夫餘)로 적혀 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31) 번한(番汗) : B.C. 2333년부터 B.C. 323년까지 왕검조선(王儉朝鮮)의 서․남쪽을 다스린 비왕(裨王)의 명칭이다. 원래는 새(鳥) 임금이라는 뜻으로 번한(飜汗)으로 적다가 나중에 글자가 바뀌어 번한(番汗)으로 적었다. 새(鳥) 임금이라는 칭호는 고구려(高九黎) 때 오간(烏干)으로 바뀌었다. 중국의 사서에는 번한(番汗) 지역이 조이(鳥夷), 오환(烏桓), 연(燕) 등 주로 새(鳥)와 관련된 이름으로 적혀 있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32) 삼한(三汗. 三韓) : 삼한(三汗)은 왕검조선의 단제(檀帝)인 진한(辰汗)과 비왕(裨王)인 마한(馬汗), 번한(番汗)을 합쳐서 부른 명칭이다. 삼한(三韓)은 B.C. 194년 이후에 한수 남쪽에 존재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합쳐서 부른 명칭이다. 삼한(三汗)과 삼한(三韓)은 존재시기와 영역이 전혀 틀린다. 일부 古記에는 三汗, 辰汗, 番汗, 馬汗이 三韓, 辰韓, 馬韓으로도 적혀 있다. 이때의 韓은 한반도라는 의미가 아니고 임금(汗)이라는 의미이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33) 한수(漢水) : 난하(灤河) 또는 황하(黃河)라는 설이 있다.

34) 동명(東明) : 고대의 구려 무리들은 해와 달을 하늘나라 임금이라 믿었고, 해와 달이 동쪽에서 떠올라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 준다고 하여 해와 달을 동명(東明)이라 불렀다.  고대에 구려 무리의 우두머리들은 자신을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칭하였는데, 동명은 천제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사용한 칭호(稱號)이다.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적혀 있는 동명(東明)의 본명은 고두막(高豆莫)이고,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적혀 있는 동명의 본명은 고주몽(高朱蒙)이다. 동명(東明)은 천제(天帝)의 아들을 칭한 사람이 사용한 칭호(稱號)이지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분들은 삼국사기만 읽고 고구려(북부여)의 고두막(高豆莫) 단제(檀帝)와 (고주몽)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동일인물로 착각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35) 신라(新羅)의 옛 땅 : 몽고 할힌골 강 유역

36) 다물(多勿) : ‘복본(復本)’은 고구려어로 ‘다물(多勿)’이며, ‘다물’은 ‘회복(恢復)’의 뜻이 있다. 잃어버린 마고성과 본성을 찾는 일을 고대 한국인은 '다물' 곧 '복본'이라고 표현했으며, 그것은 바로 복낙원(復樂園)을 의미했다. 한민족의 건국이념은 낙원의 건설이었다. 다물이나 복본의 사상은 홍익인간이나 이화세계로의 복귀를 말한 것이며, 홍익인간의 세계와 이화의 세계는 음악이 흐르고 젖이 샘솟는 행복이 넘치는 낙원이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한단지치(桓檀至治)의 세상을 누린 바가 있었다. 마고성(삼신성, 소도성)은 인간이 만든 최초의 낙원 국가였다. 단군은 마고성을 본따서 부도를 건설하였으며, 고주몽은 다물을 연호로 하여 국력의 회복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는가 하면, 박혁거세는 부도를 본받아 소부도(小符都)를 건설했다.  - <대한국 상대사> 중에서 -

38) 도성(都城) : 당시 수도는 장춘(長春).

37) 고구려(高句麗 ; 高九黎) : 임술년(B.C. 239)에 해모수(解慕漱)는 나라를 세우고 구려(九黎) 앞에 천제(天帝)를 뜻하는 고(高)자를 붙여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九黎)라 불렀다. 즉 해모수(解慕漱)때부터 구려(九黎)를 고구려(高九黎)로 명칭을 바꾸어 불렀다. 이 고구려(高九黎)는 왕검조선(王儉朝鮮)이 멸망(B.C. 238)한지 6년 후인 기사년(B.C. 232)에 왕검조선(王儉朝鮮) 때의 진한(辰汗)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 뒤 동명(東明)이 일어나 을미년(B.C. 86)에 해모수계 고구려 무리를 지금의 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도성(都城)38)으 로 들어와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九黎) 또는 북부여(北夫餘)라 불렀다. 이때 동명계 고구려 무리에 밀리어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 고구려 무리를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 또는 동부여(東夫餘)라 불렀다. 그 뒤 B.C. 58년에 고주몽이 고구려의 대통(大統)을 승계하였으나, 부여인들이 죽이려 하므로 비류수 상류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불렀는데, 고주몽이 세운 (고주몽)고구려는 나라 이름을 한자로 적음에 있어 "高九黎"로 적지 않고 "高句麗"로 적었다. 1979년에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에 "五月中高麗太王"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고구려 유물에서도 "高麗"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고주몽)고구려는 나라 이름으로 "高句麗"와 "高麗"를 모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발해(대진국)의 4대 문왕이대흥 21년에 일본국왕에게 보낸 국서에는 "高句麗國王大欽茂(고구려국왕대흠무)"로, 그 답서에는 "高麗國王大欽茂(고려국왕대흠무)"로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발해(대진국)도 "高句麗" 또는 "高麗"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하였다. 고기(古記)에는 해모수계 고구려는 <北夫餘紀> 상권(上卷)에 적혀 있고, 동명계 고구려는 <北夫餘紀> 하권(下卷)에 적혀 있으며, 고주몽계 고구려는 <太白逸事> 高句麗國本紀에 적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고구려의 시조는 해모수(解慕漱)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적혀 있는 것은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고구려가 해모수(解慕漱)가 세운 고구려를 승계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사서에는 해모수계 고구려, 동명계 고구려, 고주몽계 고구려가 고구려(高句麗), 구려(句麗), 고려(高麗) 등으로 적혀 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三國史紀)>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는 고주몽(高朱蒙)이 세운 나라의 명칭만 고구려(高句麗)로 적혀 있다. 그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紀)>만 읽은 사람들은 중국의 사서에 B.C. 37년 이전에 고구려라는 명칭이 왜 나오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출처 : 고기로 본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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