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4.19혁명, 5.18민중항쟁과 함께 현대사에서 대규모 항쟁 축에 드는 4.3항쟁은 보수와 진보의 대결장이었다.
마치 4.19와 5.16을 의거, 혁명, 쿠데타로 부르는 것이 현대사를 보는 관점이 되듯이, 이 4.3 폭동, 사태, 항쟁, 혁명으로 부르는 사람에 따라 보수 진보로 가르는 것이 우리 현대사이다.
- 제주도의 역사를 보면 대개 중앙정부와 중앙정부가 파견한 제주지방 통치세력이 제주도에 무자비한 탄압을 벌였던 적이 많다. 그래서 민란이 자주 발생했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 다. 제주도에서 극우반공세력은 제주민중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반공 히스테리에 빠져있던 미국은 극우세력을 도우면서 제주도에 미군을 심어놓았다. 물론 전국적으로 미 군정이 들어섰을 때였다. 제주도민들은 미국이 우리를 다스린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1948년 3월 1일, 3.1정신을 되살리자는 구호를 외치며 미 군정 타도를 외쳤다. 그에 군은 제주도민을 탄압했다.
■ 미군정과 제주 4.3항쟁
- 그러나 그 당시 우리도 모든 국민들이 무지했던 것은 아니다. 전혀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4.3항쟁이 었다. 미군정에 대해 반대하고, 5.10총선거에 반대하고, 분단정부 수립에 반대한 항쟁이 4.3항쟁이었다. 불행히도 4.3항쟁은 실패했다. 오히려 정부는 그 사건을 계속 공산폭동이라고 숨겨뒀다. 문민정부 들어서 특별법이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정부와 많은 국민들은 그 사건을 공산폭동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 4.3항쟁은 결국 1.미군정 반대 2.남북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위한 시위였다. 처음에는 남로당의 배후 조종 시도가 있었으나, 진전되면서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높아지며 순수한 항쟁이 되었고, 후에는 점점 흥분하며 이승만 반대까지 외쳤다.
그러므로 4.3항쟁은 공산폭동이라고 보기에는 순수한 항쟁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4.3항쟁은 점점 가며 무장투쟁까지 발전해 나아갔다. 유격대를 조직해 군경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철저히 제주도민들을 짓밟았다. 유격대를 완전 일소해 버리고, 대살륙을 벌였다. - 유격대를 완전히 일소하려던 군경의 최후의 작전 때만 하더라도 2345명의 유격대와 1608명의 민간인이 살육되었다고 한다. 4.3항쟁은 그 피해 규모가 아직 가늠되지 않고 있다.
이승만 정권 때 계속 가려지다가, 4.19혁명 후 잠깐 재평가 작업이 있었지만, 군사정권 때 다시 가려졌다. 우리가 여기서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피해규모가 5.18의 수십배의 규모였다는 것이다. -
- 미국의 일방적인 통치에 대한 반대라는 정신. 제주도는 그 전에 고려 시대에 몽고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으로 유명하다. 슈퍼파워에 대항하는 정신이 오늘날 미국에 의해 끌려가는 우리의 현실에 비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 미군정
- 우선 4.3항쟁보다는 미 군정을 알아보아야 그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국이 독일, 이탈리아, 일본에 대해 제2차 대전 당시 싸운 것은 물론 식민지 독립을 위해 싸운 것은 아니다. 미
국, 영국, 프랑스는 당시 유럽과 극동에 갖고 있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했고, 소련은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완벽한 자본가들의
정권을 세운 독일, 극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라 극동에 주도권을 잡으려 하는 일본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일에 대해 승부할 이념 중 하나로 내세운 것일 뿐이며,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본다. 전세계적으로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한 때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1950년대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1980년대말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945년 추축국의 패배로 인하여 추축국의 식민지들은 1940년대말에 일제히 독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여전히 그 힘을 잃지 않았기에 계속 식민지를 갖고 있다가, 식민지 주민들의 독립투쟁이 점점 거세져서 뒤늦게 독립한 것이다. 그리고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를 외치며 소련이 점령했던 나라들을 독립해주자 1980년대말에 동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독립한 것이다.
- 그래서 만약 우리가 구한말에 일본이 아니라, 미국에 점령당했다면 1960년쯤에 독립했을 것이고, 러시아에 점령당했다면 1990년쯤에 독립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에게 독립했던 것은 오랜 독립투쟁 덕분이 아니라 일본의 패전 덕분이었던 것이다.
- 연합국은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카이로 회담을 거치면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미국은 전세계에 공산주의의 손길이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 당시에는 중국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가던 때였고, 소련의 힘은 점점 막강해져만 갔다. 독일의 패배는 독일 내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대결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 중국, 한국이라는 극동 삼국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과 프랑스는 독일이 전쟁을 재발시킬 수 없도록 막아야 한다며 강한 힘으로 눌렀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독일보다는 소련이 더 위험한 존재였다.
그러자 미국 영국 프랑스가 통치하던 구역을 합해서 서독을 세웠고, 소련은 공산주의자들을 심어놓고 가며 동독을 세워 놓았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민중들이 잘 사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 서독에 어마어마한 지원을 부었다.
- 한편 극동 삼국 중 중국은 공산화되었다.
미국은 일본과 한국에는 새로운 방법을 썼다. 극우세력이 집권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군정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맥아더, 한국은 하지가 사령관이 되어 군정을 세웠다.
소련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김일성을 앞세워 군정을 세웠다.
미국은 점점 다급해졌다. 그 때 미국이 선택한 방법은 한국과 일본의 미래,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미래에도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생존을 위해 패전 후 반공투사로 변했다. 미국은 그들을 주요 요직에 앉힌 것이다. 결국 극우파와 군국주의자들은 버젓이 일본을 다시 휘어잡은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친일파들은 해방 후 빠르게 반공투사로 변했다. 미국은 그들을 요직에 앉혔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이 다. 물론 이승만은 친일파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는 친미파였다.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2류 독립운동가였다. 백범 김구 선생, 몽양 여운형 선생에 비해 초대 대통령이 되기에는 자격이 모자랐다. 그리고 이승만 자신도 공산주의에 반대하기 위해 친일파를 이용했다. 일례로 반민특위가 흐지부지된 사실을 들 수 있다. 친일파들은 다시 사회에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 서독, 일본, 남한 국민들은 잘살게 되면서 공산주의를 막았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미국은 너무 내정간섭을 심하게 했다.
일례로 독일과 일본이 생화학무기를 만들지 못하고 제대로된 군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미국의 간섭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장거리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하고,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이유도 미국의 간섭이라고 볼 수 있다. -
- 오늘날에도 미국의 슈퍼파워는 여전하다. 90년대 초에는 소련의 해체, 90년대 말에는 일본의 경제 몰락으로 인해 미국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일단 없다고 보는게 옳다.
그 러나 힘은 약해도 반미 노선을 걷는 나라는 많다. 우선 현재 미국의 국력 다음 가는 국력을 지닌 나라는 일본이라고 볼 수 있다. 자민당의 화려한 부활과 보수우익의 강력화는 미국의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의 우경화는 미국의 일극 체제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낳았다.
현재 미국에 대항하는 나라는 이라크, 이란, 쿠바, 북한 테러4국과 중국밖에 없다. 즉, 공산권과 이슬람권이 미국의 눈엣가시인데, 물론 이들은 미국의 힘에는 아직 멀었다. 다만 중국의 빠른 성장은 미국에 또 하나의 위협을 안기고 있다. - 미국의 힘에 도전한 예로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들 수 있다. 6.25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승리에 실패한 전쟁이다. 공산권 국가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큰 희망을 얻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다. 제3세계 국가들은 이 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의 노선에 믿음을 갖게 되었다.
-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보다 국력이 앞선 나라는 없었고, 단 소련과 비슷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반공주의를 내세워 전세계의 국가들에 대해
간섭해 왔다는 것이다. 그 중 동아시아의 신생 국가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 - 이승만이라는 반공 투사를 앞세워 한국에 정권을 세운다는 미국의 전략은 주효했다. 애국독립투사들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다.
중국의 경우, 독립투쟁에 가장 열성이었던 쑨원이 국부였다. 인도 역시 독립투사 네루가 초대 총리가 되어 국부로 남아 있다.
베트남도 전설적 독립 투사 호치민이 국부다. 국부라면 국민들과 후세들에게 거의 흠집 없이 존경 받아야 할 사람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백범 김구나 몽양 여운형, 우사 김규식 같은 지도자를 남겨두고, 2류 독립운동가 우남 이승만이 국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애국독립투사들의 정치적 실패는 한국역사에 큰 한이 되었다.
애 국독립투사들이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면, 우리 현대사에는 완벽히 전 국민들이 존경하는 인물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흠집이 남겨지면서 오늘날 우리 현대사에는 존경할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면서도, 우리의 잘못이다. 그것은 미국의 힘을 앞세운 전략에 따른 일이었기에 우리가 어쩔 수 없었던 면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단합해 최후까지 진정한 해방을 위해 투쟁했어야 했다.
만약 우리 국민들이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계속 인내하고 노력했으면, 분단도 없을테고, 제대로 된 국부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그저 일본에게서 얻어낸 해방만 생각하고, 미국과 소련이 우리를 점령하려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저 독립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조급증에 우리는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 준,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다 준 은인으로만 알았다. 그것은 4.19혁명, 5.18항쟁 때까지 우리에게 뼈아픈 경험을 안겼다. 그러나 6.10항쟁 이후에는 확실히 미국에 대해 알게 되었다.
<출처-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