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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의 후예이길 거부하는자 .. 꺼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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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한관경 본기

三韓管境 本紀

  태백산은 북쪽을 달리는 산으로 높게 비서갑(菲西岬)의 땅에 우뚝 서 있다. 물을 뒤로 업고 산을 끌어안고 있는데, 크게 둥그렇게 돌아 모이는 곳이 있으니 곧 대일왕(大日王)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한웅천왕이 여기까지 순수하시사 사냥하시었기 때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풍백(風伯)은 천부(天符)를 거울에 새겨 앞서 가고, 우사(雨師)는 북을 치며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雲師)는 백검(伯劍)으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임하실 때의 의식은 이처럼 장중하였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完達)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한 바 있다. 뒤에 웅녀의 군(君)이 천제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大監)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함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은 나라 사람들의 뜻을 살펴서 저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부모는 공경해야하며, 처자는 보호 양육해야 하며, 형제는 사랑하고 장로(長老)는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뭇 백성은 믿어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工匠),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고 땅을 하나같이 평등하게 하여 이로써 잘 교화시키니 멀리 떨어진 백성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熊氏)1)가 갈려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한웅2) 말기에 소전(少典)3)은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한웅 아들 신농(神農)은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소전의 다른 지파<別孤>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였으므로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와라(斯瓦羅) 한웅4) 초기의 일이다.


  웅녀군의 후손으로서 여(黎)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단허(檀墟)에 책봉 받아서 왕검이 되매,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나아와 특산물을 바치며 이로써 귀화하는 자가 천 여명을 헤아렸다. 뒤에 460년 지나 신인(神人)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椑王)이 되었다. 섭정하신지 24년에 웅씨의 왕은 전쟁하다가 붕어하시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한을 통일하고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곧 나라의 인물들을 불러 약속을 세워 가로되,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물어 공법을 만들고 이를 천부(天符)라 할지니, 그 천부란 만세의 강전(綱典)이며 지극히 존중하여 아무도 이를 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삼한으로 나라를 나누어 통치하시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천왕께서 다스리시고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여시어 조선이라 했는데, 이를 일세 단군이라 한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지내는 곳인데,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했다.


  마한5)세가(馬韓世家) 상(上)


  熊虎交爭之世桓雄天王尙未君臨苗桓乃九皇之一也在昔己爲我桓族遊牧農耕之所而及神市開天以土爲治一積而陰立十鉅而陽作無櫃而衷生焉

  곰 무리과 범 무리가 서로 다투던 옛날 한웅천왕께서 아직 군림하시기 전 묘한(苗桓)은 구황(九皇)의 하나였다. 옛적 우리 한족(桓族)이 유목 농경하던 때에 신시(神市)의 가르침이 열렸다. 땅으로써 다스리기 위하여 적(積)을 하나로 하고, 음(陰)은 십거(十鋸)를 세우고 양(陽)은 무궤(無匱)를 만들고 충(衷)은 여기에서 생했다.<一積而陰立 十鋸而陽作 無匱而衷生>


  봉황은 날아 모여들어 백아강(白牙岡)에 살고 선인은 법수교(法首橋)로 오고 갔으니 법수는 선인의 이름이다. 사람과 문물이 어느덧 풍숙하였으니 때마침 이때에 자부선생(紫府先生)께서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드시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를 칭찬하였다.


  삼청궁(三淸宮)을 세우사 그곳에 거하시니,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頡), 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이에 윷놀이를 만들어 이로써 한역(桓易)을 강연하니 대저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적은 바로 천부(天符)의 유의(遺意)였다.


  옛날 한웅천왕께서는 천하가 크다함을 아시고 한 사람이 능히 교화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시며 풍백․우사․운사를 거느리사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생명을 주관하고 형벌을 주관하며 병마와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무릇 인간 세상의 360여 사를 주관케 하시더라, 책력을 만드사 365일 5시간 48분 46초를 일년으로 하니 이것이 바로 삼신일체의 윗어른이 남긴 법이다.


  고로 삼신으로써 가르침을 세워 뜻을 펴는 기치로 삼았다. 그 글에 가로되「일신(一神)은 충(衷)에 내리고 <一神降衷> 성(性)은 광명으로 통하니 <性通光明>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에 따라 교화하여 <在世理化>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弘益人間>」고 했다.


  이때부터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의 형상의 웅상(雄常)을 보게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어디나 사방에서 온 백성들이 있었는데 동그랗게 둘러 부락을 이루었으니 네 집이 한 우물을 썼으며, 20분의 1세를 냈다. 해마다 풍년이 드니 언덕과 산에는 곡식이 쌓이고 이를 즐겨 춤추며 태백환무(太白環舞)의 노래를 지어 이를 전했다.


  계속하여 치우씨가 있었는데 구야(九冶)를 만들어서, 광석을 캐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고, 또 돌을 날리는 기계도 만들었다. 이에 천하는 감히 그에게 대적하는 자가 없었다. 때에 헌구(軒丘)가 굴복치 않으니 치우는 몸소 군대를 인솔하고 출동하여 이를 징벌코자 하여 크게 탁록에서 싸웠다. 탁록은 지금 산서성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싸움이 있기 전에 탁록이 격문을 만들어 81종당(宗黨)의 대인(大人)을 소환했다. 먼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분포하더니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게 하고는 가로되,


 「그대 헌구야! 짐의 고함을 밝히 들으렸다. 해의 아들이라 함은 오직 짐 한 사람 뿐으로 만세를 위하고 공동생활의 옳음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닦는 맹세를 짓노라. 그대 헌구여! 우리의 삼신일체의 원리를 모독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행을 게을리 하였으니 삼신은 오래도록 그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삼신의 토벌을 행하도록 하였으니 그대 일찌감치 마음을 잡아서 행동을 고칠 것이다. 자성은 너에게서 찾을 것이니 그대의 머리 속에 있음이로다.<自性求子 降在爾腦> 만약 명령에 순응치 않는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진노하여 그 목숨이 제 목숨이 아닐 것이다. 네 어찌 두렵지 않은가?」라고 했다. 이에 헌구가 평정되어 복종하니 천하는 우리를 기둥처럼 여기더라.


  때에 유위자(有爲子)가 묘향산에 숨어살았으니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지나가다가 웅씨군을 알현하니 웅씨군은「나를 위해서 도(道)를 말하라」고 청했다. 대답해 가로되


 「도의 대원(大原)은 삼신에서 나오나니 도란 도라고 할 것도 없으며 그 나타나는 것도 없는 것입니다. 도라고 할 것이 있다면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이며 나타남이 있다면 역시 도는 아닌 것입니다. 도는 항상 같은 것이 없고 때(경우)에 따르는 것이니 이에 도의 귀함이 있는 것이라, 나타남(쓰임)도 항상 똑같은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나니 이에 나타남의 귀함이 있는 것이요, 그 겉모양이 크지도 않으며 그 속이 작지도 않는 것이 도니 이에 감싸지 못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기틀(機)은 내 마음의 기틀에서, 땅의 모양은 내 몸의 모양에서, 사물의 주관(宰)은 나의 기(氣)의 주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함이며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감<執一而含三 會三而歸一>인 것입니다. 일신(一神)이 내려옴(一神降衷)은 사물을 다스림이니 바로 천일(天一)이 물을 낳은 이치요, 성품이 광명에 통함(性通光明)은 삶의 다스림이니 바로 지이(地二)가 불을 낳은 이치요, 세상에서 교화를 폄은 마음을 다스림이니 바로 인삼(人三)이 나무를 낳은 이치인 것입니다. 대개 대시(大始)에 삼신님은 삼계(三界)를 만드셨으니, 물은 하늘을 본뜨고 불은 땅을 본떴으며 나무는 사람을 본 뜬 것입니다. 무릇 나무라는 것은 뿌리를 땅에 두고 하늘을 향하였으니 역시 사람도 땅을 밟고 서서 능히 하늘을 대신함이라」
  라고 하니, 임금께서는「옳을시고 그 말씀이여!」하시더라.


  단군왕검은 천하를 평정하시더니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관경(管景)을 만드시고 곧 웅백다(熊伯多 : 1대)를 봉하여 마한(馬韓)이라고 하였다. 달지국(達支國)에 도읍하였으니 역시 백아강(白牙江)이라고도 불렀다. 마한산(馬韓山)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하니 천왕께서 조서를 내려 가로되,


 「사람이 거울을 보면 그 곱고 미운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백성들이 임금을 보면 그 치란(治亂)은 정치에 나타난다. 거울을 보면 반드시 먼저 형체를 보고 임금을 보면 반드시 먼저 정치를 보느니라.」

  라고 하니 마한(馬韓)은 글을 올려 가로되,

 「거룩할 손 그 말씀이시여! 성주(聖主)는 능히 대중의 뜻에 따르는 고로 길이 넓고, 무능한 임금은 즐겨 독선을 쓰는 고로 길이 좁사오니, 속으로 반성하여 게으름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단군왕검 51년(무오 B.C.2283) 천왕은 운사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6)을 혈구(穴口)7)에 쌓고 제천의 단8)을 마리산(摩璃山)에 만들었으니, 강남의 장정 8,000인을 선발하여 이들에게 일을 하도록 하였다. 신유(B.C.2280) 3월 천왕은 몸소 마리산으로 행차하여 하늘에 제사지냈다. 웅백다(熊伯多)가 재위 55년에 죽으니 아들 노덕리(盧德利 : 2대)가 즉위하였다. 노덕리가 죽으니 그의 아들 불여래(弗如來 : 3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부루9) 12년 임자(B.C.2229) 가을 10월이다. 명을 내려 칠회(七回)의 책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참고)10) 이듬해(계축년 B.C.2228)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버들을 백아강에 심고 도정(都亭)을 지었다. 병진년(B.C.2225)에 삼일신고의 비를 새겨 남산(南山)에 세우게 했다. 경신년(B.C.2221)에 도전(稻田)을 일구고 기해년(B.C.2182)에 소도를 세우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가르침을 폈다. 이에 치화가 크게 행해졌다.


  단군 가륵(3세, 기해년 B.C.2182~계미45년 2138) 제3년(신축 B.C.2180) 불여래(弗如來)가 죽고 아들 두라문(杜羅門 : 4대)이 즉위했다. 을사년(B.C.2176) 9월 천왕(3세 단군 가륵)께서 칙서를 내려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의 큰 근본은 내 마음의 중일(中一)에 있어 사람이 중일을 잃으면 일를 성취할 수가 없으며, 사물이 중일을 잃으면 기울어져 엎어지게 되나니, 임금님의 마음은 위태로워지고 뭇 사람의 마음은 어두워질 뿐이다. 모든 사람은 잘 통찰하여 균형을 잡고 중심을 잡을 것이며, 이를 어기지 않은 후에야 마침내 한결 같음을 얻으리라.

  중심이 잡힌 한결같은 도<惟中惟一之道>란, 아비는 자애롭고, 아들은 마땅히 효도하고, 임금은 마땅히 의롭고, 신하는 마땅히 충성스럽고, 부부는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형제는 마땅히 서로 사랑하고, 노소는 마땅히 차례가 있어야 함이다. 몸가짐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배움을 닦고 업을 익히며, 지혜를 열고 능력을 드러내어 널리 유익케 하고, 서로 근면하여 스스로 이루되 만물을 열어 평등케 함이다. 천하를 맡음으로서 마땅히 국가의 대통을 존중하고 나라 법을 준수하며, 각기 그 맡은 바 직책을 다하고 부지런함을 권장하여 산업(産業)을 보전함이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시에는 몸을 던져 의(義)를 온전하게 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용감히 나아가 만세 무강한 복을 도움이다. 임금과 나라 사람 모두가 이를 적절히 새겨 변함없도록 할 것이로되, 모두가 완전하게 이루고자 하는 지극한 뜻이니 공경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두라문(杜羅門)이 죽었다. 아들 을불리(乙弗利 : 5대)가 즉위하였다. 을불리가 죽으니, 아들 근우지(近于支 : 6대)가 즉위하였다. 이때가 단군 오사구(烏斯丘)11)의 을유년(B.C.2136)이다. 경인년(B.C.2131)에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을 살수(薩水)12)에서 건조케 하였다. 곧 진한(辰韓)의 남해안이다. 임자년(B.C.2109)에 한(韓)은 명령을 받고 상춘(常春)에 들어가 구월산에서 삼신님께 제사지내는 것을 도왔다. 10월에 이궁(離宮)을 모란봉의 중턱에 세워 천왕이 순수하다가 머무르는 장소로 삼았다. 3월이 될 때마다 마한에 명하여 열병(閱兵)하도록 하고 사냥하게 했다. 16일에 기린굴에 제천하고 조의(皂衣)13)를 하사하여 가관(加冠)의 예를 행하였으며 가무백희(歌舞百戱) 끝에 파하였다.


 갑인년(B.C.2107)에 근우지가 죽자 아들 을우지(乙于支 : 7대)가 즉위하였고, 을우지가 죽으니 동생 궁호(弓戶 : 8대)가 즉위하였다. 궁호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으니 두라문(杜羅門)의 동생인 두라시(杜羅時)의 증손 막연(莫延 : 9대)이 명을 받아 마한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무신년(B.C.1993)에 단군 우서한(于西翰)14)은 백아강에 머무르면서 명하여 밭을 나누어 땅을 주어 네 가문을 한 구(區)로 만들게 하시고, 각 구는 일승(一乘)을 내서 향토를 지키도록 하였다. 단군 노을(魯乙)제15)의 임인년(B.C.1939)에 막연이 죽었으니 동생 아화(阿火 : 10대)가 즉위하였다. 때에 단군 도해(道奚)16)가 바야흐로 개화할 것을 결심하고 평등하게 다스렸다. 명을 내려 대시전을 대성산에 세우고 큰 다리를 대동강에 세웠다. 삼홀(三忽)로 전(佺)을 삼아 경당(扃堂)을 설하여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의식을 정하고 삼윤구서(三倫九誓)의 훈(訓)을 강론하게 하니, 한도(桓道)의 문명이 번성함은 먼 나라까지 들려서 하(夏)나라의 왕 근(厪)이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쳤다. 정사년(B.C.1864) 아화가 죽으니 아들 사리(沙里 : 11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아한(阿漢)17)의 을묘년(B.C.1806)에는 사리가 죽었으니 동생 아리(阿里 : 12대)가 즉위하였다. 단군 고불제(古弗帝)18)의 을유년(B.C.1716)에 아리가 죽고 아들 갈지(曷智 : 13대)가 즉위하였다. 갈지가 죽으니 단군 대음제(代音帝)19)의 무신년(B.C.1633)에 갈지의 아들 을아(乙阿 : 14대)가 즉위하였다. 기유년(B.C.1632)에 탐모라(耽牟羅) 사람이 말 30필을 바쳐왔다.


  을아가 죽고 단군 여을제(餘乙帝)20)의 신미년(B.C.1550)에 아들 두막해(豆莫奚 : 15대)가 즉위하였다. 임신년(B.C.1549) 3월16일 몸소 마리산에 행차하여 삼신을 참성단에서 제사하였으니, 하나라 왕 외임(外任)이 사신을 파견해 제사를 도왔다.


  두막해가 죽으니 기축년(B.C.1472)에 아들 독로(瀆盧 : 16대)가 즉위하였다. 독로가 죽고 단군 고홀제(固忽帝)21)의 경오년(B.C.1371)에 아들 아루(阿婁 : 17대)가 즉위하였다. 아루가 죽고 무오년(B.C.1323)에 동생 아라사(阿羅斯 : 18대)가 즉위하였다. 이 해에 고등(高登)이 모반을 일으켜 개성에 웅거하면서 천왕에게 항거했다. 마한이 드디어 군대를 일으켜 이를 토벌코자 하여 홍석령의 경계지점에 이르렀을 때 천왕께서 고등(高登)을 용서하고 우현왕(右賢王)으로 삼았다는 소문을 듣고 곧 토벌을 멈추었다.


  을미년(B.C.1286)에 천왕은 해성에서 욕살 서우여(徐于餘)에게 선양하시고자 하니 마한은 이의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우현왕(=高登)의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즉위(B.C.1285)하니 마한은 군사를 정돈하여 몸소 이끌고 나아가 해성에서 싸웠는데 싸움에 지고는 돌아오지 못하였다.


  마한세가(馬韓世家) 하(下)


  단군 색불루(索弗婁)22)가 아버지께서 이루어 놓으신 힘을 계승하여 대병(大兵)을 장악하니, 진한(辰韓)은 스스로 무너졌고 나머지 두 한(番韓․馬韓)도 역시 이길 수 없어서 패해 버렸다. 전제(前帝)23)는 사람을 시켜 옥책(玉冊)과 국보를 전하여 제(帝)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 임금이 백악산(白岳山)에 도읍을 골라 세우니 여러 욕살들이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으나. 여원흥(黎元興)과 개천령(蓋天齡) 등이 명을 받아 저들을 설득했다. 이에 모든 욕살들이 빠짐없이 따르게 되었다.


  병신원년(B.C.1285) 정월 마침내 녹산(鹿山)에서 즉위하니 이곳을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한다.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그대들 아사달에 사람을 보내 옥책과 국보를 전함으로써 전제의 왕위를 선양케 하였느니라. 이제 이름을 세습하여 존귀함을 칭한다 하더라도 나라의 산천은 이미 그 이름이 장부에 실렸고, 제천의 예는 마땅히 나라의 법에 정한 바니, 남용할 일이 아니다. 반드시 옛 실례를 따를 지니라. 이에 성실하게 공경을 다하고자 하는 자는 이제 마땅히 제사를 환영하여 이전의 제물들을 골라 삼가 신의 영역을 깨끗이 하고 정결히 한 후, 생폐(牲幣)를 갖추어 이를 가지고 삼신에 보답할지어다.」


  이에 단제는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흥(黎元興 : 19대)에게 내려 주었다. 16일 이른 아침에 경건하게 삼한(三韓)의 대백두산(大白頭山)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단제가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 제사를 올렸다.


  그 백두산의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짐 소자 단군 색불루는 손을 모아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옵니다. 친히 천제의 아들로서 스스로를 닦고 이로써 백성에 미치게 하여 반드시 제천하고 공경하도록 하겠습니다. 황상(皇上)은 삼신의 밝은 명을 받으사 큰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이미 삼한 5만리의 땅을 주시고, 더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베풀어 누리도록 하셨으므로, 마한 여원흥을 보내어 삼신일체인 상제의 단에 제사 올리게 하였습니다. 신은 밝고도 밝으신지라 물건에 근본이 되시어 버리심 없나니, 맑고 깨끗한 재물로써 정성드려 바쳐올리오니 내리시어 드시옵고 말없이 도우시옵소서, 반드시 새 임금의 기틀을 도우시옵소서, 세세토록 삼한의 천만년 무강한 왕업을 보전하고 해마다 곡식이 풍성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풍족하게 하소서, 바라노니 밝으신 우리의 성제(聖帝)시여, 나를 비워서 만물이 있기를 염원하옵니다.」라고 하였다.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란 관경(管景)을 말한다. 진조선(眞朝鮮)은 천왕이 친히 다스리니 그 땅은 곧 옛날의 진한(辰韓)이다. 삼한(三韓)이 모두 하나같이 명령에 복종하였다. 여원흥(黎元興)에게 명하여 마한(馬韓)이 되어 막조선(莫朝鮮)을 통치케 하고 서우여(徐于餘)로 하여금 번한(番韓)을 삼아 번조선(番朝鮮)을 통치케 하였다. 이를 통틀어 이름하여 단군(檀君)의 관경(管景)이라 한다. 이것이 곧 진국(辰國)으로 역사에서 말하는 단군조선이다.


  여원흥이 이미 대명을 받아 대동강을 장악하니 역시 왕검성이라 한다. 천왕도 역시 매년 봄에는 반드시 마한에 머무르시며 백성의 근면하기를 정치로써 장려하였으니 이에 자공후렴(藉供厚斂)의 폐단이 마침내 사라졌다. 이보다 앞서 조서를 내려 가로되「생각컨대 짐 한 사람을 공양키 위하여 백성들을 들볶아 공물을 내게 함은 곧 정치가 없다는 말이니, 정치 없고서야 왕이 무슨 필요가 있으리오」하시고는 엄하게 명하여 이를 철폐하였다.


  무자년(B.C.1243) 마한은 명을 받고 도읍에 들어와 간하기를 도읍을 영고탑으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불가하다고 하시며 이에 따르지 않았다. 여원흥이 죽으니 기축년(B.C.1232)에 아들 아실(阿實 : 20대)이 즉위하였고, 아실이 죽으니, 동생 아도(阿闍 : 21대)가 즉위했다. 기묘년(B.C.1122 ?)에는 은나라가 망했다. 3년 뒤의 신사년 (B.C.1119 ?) 아들 서여(胥餘)가 거처를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서북의 땅으로 피하여 가니 막조선은 이를 듣고 모든 주와 군을 샅샅이 조사하더니 열병을 하고 돌아왔다.


  아도가 죽자 경술년(B.C.1031)에 아들 아화(阿火 : 22대)가 즉위하였고 아화가 죽자 병술년(B.C.995)에 동생 아사지(阿斯智 : 23대)가 즉위했다. 아사지가 죽자 단군 마휴(摩休)24)의 정해년(B.C.934)에 형의 아들 아리손(阿里遜 : 24대)이 즉위하였다. 아리손이 죽으니 아들 소이(所伊 : 25대)가 즉위했고 소이가 죽으니 정해년(B.C.934)에 아들 사우(斯虞 : 26대)가 즉위했다. 무자년(B.C.933)에 주(周)나라 왕 의구(宜臼)가 사신을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사우가 죽으니 갑진년(B.C.677)에 아들 궁홀(弓忽 : 27대)이 즉위하더니 갑인년(B.C667)에 협야후(陜野侯)25)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倭人)26)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 궁홀이 죽으니 아들 동기(東杞 : 28대)가 즉위하였고 동기가 죽자 단군 다물(多勿)27)의 계유년(B.C.588)에 아들 다도(多都)가 즉위했다. 다도가 죽자 임진년(B.C.509)에 아들 사라(斯羅 : 30대)가 즉위하였고, 사라가 죽자 아들 가섭라(迦葉羅 : 31대)가 즉위했다. 가섭라가 죽으니 아들 가리(加利 : 32대)가 즉위하였는데, 을묘년(B.C.426)에 융안(隆安)의 사냥족들 수만이 모반을 일으켰다. 관병이 싸울 때마다 패하여 적이 마침내 심히 급하게 도성에 쳐들어오니 가리도 역시 출전하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병진년(B.C.425)에 상장(上將) 구물(丘勿)28)이 마침내 사냥꾼들의 두목 우화충(于和冲)을 죽여버리고 도성을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가리의 손자라는 이유로 전나(典那 : 33대)가 들어가 막조선을 계승하니 이때부터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다.


  전나가 죽으니, 아들 진을례(進乙禮 : 34대)가 즉위했다. 진을례가 죽으니 을묘년(B.C.366)에 아들 맹남(孟男 : 35대)이 즉위하였다. 무술년(B.C.323) 수유(須臾)의 사람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번한에 들어가 웅거하고, 자립하여 번조선 왕(王)이라 칭하였다. 연나라는 사신을 보내 우리와 함께 기후를 치자고 했으나 막조선은 따르지 않았다.


  계해년(B.C.238) 단군 고열가(高列加)29)가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아사달에 들어가셨다. 진조선(眞朝鮮)은 오가(五加)와 함께 진왕(秦王) 정(政)30)에게 복종하게 되더니 끝내 미처 회복하지 못한 채 종말을 맞았다.


  번한세가(番韓世家) 상(上)


  치우천왕은 서쪽으로 탁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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